[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2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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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그렇게 넓은 흰 날개를 달은 당신같은 순수한 시인을 볼 일이 없습니다.

-조병화

눈쌓인 겨울 산에서 먹이를 찾는 고라니나 토끼는 밀렵꾼들이 쳐놓은 덫에 걸린다. 그렇듯이 이땅의 지성인들도 생각을 밝히고 시대를 살다가 어느 날 권력의 덫에 걸려들기가 일쑤였다. 소설가이며 언론인인 우인(雨人) 송지영(宋志英)은 잘못도 없는 채 권력의 덫에 걸려 8년 2개월 동안 징역살이를 하는 긴 '우수의 일월'을 보낸다.

우인은 1916년 평북 박천에서 태어나 한문고전과 신학문을 익히고 열 아홉살에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작품 모집에 생활수기 '화전민들과 같이'가 입선되어 작품 발표와 함께 언론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해방 후 국제신문 주필 등으로 있다가 조선일보 편집국장이던 1961년 5.16을 만나 민족일보 사건의 핵심으로 체포돼 9월 혁명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뒤에 무기로 감형된다.

혁명재판이 우인에게 씌운 죄목은 민족일보 창간에 자금을 대준 사람과 함께 텔레비전 방송국을 세우려 했으며 '북쪽에 고무 동조'했다는 것이었다.

우인은 국내 문인들의 탄원과 국제사면기구인 앰네스티의 후원활동으로 1969년 출감해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복직, 1970년에는 중앙일보에 소설 '대해도'를 연재하는 등 오랫동안 장만했던 글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내가 우인을 자주 뵙게 된 것은 70년대 중반 '바구니회'에 끼면서부터인데 송지영.홍윤숙.이봉래.홍기삼.김영광.강계순 등이 한달에 한 번쯤 만나 술과 덕담을 나누는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문인이 아닌 김영광이 늘 앞장섰는데, 그 까닭은 좌장인 우인과 김영광의 아주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다. 우인이 사형선고를 받고 옥중에서 일반 면회도 잘 안되던 때 한 사내의 내방을 받는다.

새로 창간한 '신사조'발행인이라고 신분을 밝힌 그는 우인에게 원고청탁을 하러 왔다고 했다.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우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솟구치는 눈물을 누를 수 없었다.

'신사조'는 중앙정보부가 '사상계'에 맞서기 위해 위장 창간한 종합월간지였고, 발행인 김영광은 중정 직원이었다. 그 만남은 출옥 후까지 이어졌고 김영광은 요직을 두루 거쳐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깊숙이 발을 들여 놓고 있었다.

그가 아직 중정간부로 있던 72년 소설가 이병주에게서 우인이 서독 사민당의 초청을 받았는데 아무도 신원보증을 서주지 않아 여권이 안 나오니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김영광은 보증을 해서는 안되는 직책이면서도 '직권 남용'으로 여권을 발급토록 한다.

우인이 서독으로 가게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어떤 인사는 김영광에게 "그 사람 나가면 돌아오지 않을 터인데 어쩌자고 그런 일을 했느냐"고 항의했다.

고민 끝에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라도 할 양으로 전화를 집었더니 벌써 김포공항으로 나간 뒤였다. 직원에게 3백달러가 든 봉투를 줘 공항에 보냈다. 비행기에 탑승한 우인은 "사정이 있어 비행기의 출발이 늦어진다"는 기내방송을 듣는다.

한 20분이 흘렀을까? 출입문이 열리더니 한 사내가 "송지영 선생님"하고 찾는다. "이제 꼼짝없이 끌려 내리는 구나"하는데 사내는 봉투를 내민다.

우인은 옥중에서 쓴 원고지 6천장 분량의 '우수의 일월'에 조병화의 시, 김광섭.김소을.이원수.홍윤숙.김남중.김수영의 편지를 곁들여 86년 책으로 펴낸다. 삼 년 뒤, 73세를 일기로 그는 '우수의 일월' 밖으로 떠났다.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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