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과거 정부는 무엇을 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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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고정애
논설위원

월드뱅크 사람들 사이에 오간다는 얘기다. 떠날 때 후임자를 위해 세 통의 편지를 남긴다고 한다. 위기마다 하나씩 열어볼 수 있게 말이다.

 “무조건 전임자를 욕해라.” 첫 편지다. 대개 일을 맡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일 터이니 충분히 통함 직한 조언이다. 한참 일하다 겪을 두 번째 위기용 편지엔 “예산을 탓하라”고 한단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편지는 이렇다. “당신도 편지 세 통을 쓰고 나가라.”

 그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떠오른 얘기다.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원전 비리와 전직 대통령들의 추징금 문제를 거론하며 “과거 10년 이상 쌓여온 일인데 역대 정부가 해결 못 하고 이제야 새 정부가 의지를 갖고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이 차제에 새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지라는 건 난센스적인 일이다. 과거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출범한 지 100일 좀 지난 정부인데 무에 잘못이 있겠는가. 인사 빼곤 말이다. 그런데도 모든 걸 책임지라고 한 사람이 있다니 둘 중 하나일 게다. 무지하거나 무모하거나.

 사실 과거 정부에서도 ‘과거 탓’ 많이 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직접 “과거 정부는 무엇을 했는가”라고 외친 경우는 드물었다. 특히 임기 초반엔 말이다. 비록 “제 딴엔 새집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쓰레기가 많이 있었다”(노무현 전 대통령)고 여겨도 말이다.

 이명박정부 때 저축은행 퇴출과 비리 수사 과정을 지켜본 A씨의 목격담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게다. 당시 핵심부에선 DJ 때 상호신용금고를 저축은행으로 허가했고 노무현정부 때 대출 규제를 풀어준 만큼 부실의 씨앗도 그때 뿌려졌다고 판단했다. 도덕적 우월감은 그러나 이내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정작 잡혀간 건 대통령의 형이었고 청와대 부속실장이었기 때문이다.

 A씨에게 물었다. “그리 될 줄 알았어도 시작했겠느냐”고. 그는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이같이 답했다.

 “거대한 비리였다. 감사원 등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데 1년 걸린 걸로 안다. 그만큼 비리 구조가 견고했다. 결과적으론 시스템은 견뎠다고 본다. 그러나 개인 하나하나가 공략돼 무너졌는지는 몰랐다.”

 시스템이 견뎠다는 말은 퇴출돼야 할 저축은행들은 마땅히 퇴출됐다는 의미다. 로비가 실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그의 말이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하는데 야당이 욕했다고 하더라. 야당이 그럴 자격이 있나. 그래도 ‘저축은행 부실은 우리 책임이 아니다’라는 말을 못했다고 하더라. 청와대에 앉아 있으면 그러나 그렇게 말하고 싶어진다더라. 과거 정권의 짐을 털어버리고 가고 싶은 게지. 국정이 어디 그런가. 연속선상에서 욕먹으면서 해결하고 가는 거지.”

 박 대통령의 선택은 달랐다. 공개 발언을 통해 현 정부의 잘못이 아니란 걸 부각했고 자신의 해결 의지를 강조했다. 여론의 흐름이 좋을 때여서 “국정에 무한책임을 져야 할 대통령이 남 탓을 한다” “책임 따지는 건 해결되고 나서 해도 된다”는 비판도 피할 수 있었다. 영리한 행보다.

 이번 사안은 하지만 ‘과거 정부의 잘못’이라고 꼬리표를 붙이기엔 애매한 점이 있다. 2000년대 중반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의 200배 규모(17조원)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추징금을 회수하기 위해 검찰이 2년여 대책반을 가동했는데 불과 1억여원만 찾아냈었다. 시도는 했다는 얘기다. 이번 원전 비리는 지난 4월 제보로부터 불거진 일이다.

 번지수가 그른 ‘과거 정부 탓’이더라도 대통령의 의지가 팍팍 실린 지금 두 사안이 웬만큼 해결됐으면 좋겠다. 꿩 잡는 게 매 아닌가.

 그래도 한 가지. 최근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수사로 논란의 중심에 선 채동욱 검찰총장을 두고 청와대 고위 인사가 “이명박정부가 임명한 총장”이라고 했단다. 박 대통령이 4월 임명한 게 엄연한데도 말이다. ‘과거 정부 탓’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있다.

고정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