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세상읽기

박 대통령, 중국 가면 짜장면 집에 들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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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일러스트=강일구]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새 부대엔 새 술을 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새집으로 이사를 가면 예전에 쓰던 멀쩡한 가구도 바꾸기 십상이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새 인물과 새 정책이 넘쳐난다.

 국가 간 관계라 해서 다를 바 없다. 한·중 관계도 늘 새롭게 포장돼 왔다. 새 지도자가 탄생할 때마다 양국 관계를 규정하는 수식어가 바뀌었다. 1992년 수교 이후 한동안 양국엔 ‘우호협력 관계’란 이름표가 붙었다.

 이후 한국의 새 대통령이 방중할 때마다 수식어가 격상됐다. 98년 김대중 대통령 방중 시 양국은 ‘협력동반자 관계’가 됐다. 동반자 관계란 서로 다투지 않는 사이다. 어느 제3국을 가상적으로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맹과 구별된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방중 때 양국은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가 됐다. 2008년 이명박(MB) 대통령 당시엔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올라섰다. 앞으로 더 갖다 붙일 수식어가 없지 않겠느냐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왔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MB 정권 내내 양국은 불편한 시기를 보냈다.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사건 등을 거치며 일선의 양국 외교관 사이엔 막말까지 오가는 바람에 ‘이게 전략적 동반자 관계’냐는 탄식이 나왔다.

 이달 말로 예정된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을 앞두고 또다시 양국 관계를 어떻게 수식할지가 관심이다. 일각에선 더 이상의 이름표는 필요치 않다는 입장이다. 기존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의 내실을 채우면 되지 않겠느냐고 한다.

 참담했던 과거 5년의 기억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 이름이 무슨 잘못인가.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하지 못한 게 문제가 아닌가. 이름은 그렇게 되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다. 오히려 목표를 제공함으로써 양국 관계를 추동하는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5년 관계를 규정하는 키워드로는 어떤 게 좋을까. ‘신뢰(信賴)’가 적절해 보인다. 이에 따라 양국 관계는 ‘신뢰의 동반자 관계’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신뢰는 박근혜정부의 국정기조를 관통하는 핵심어다. 박 대통령은 국민께 드린 약속은 꼭 지킨다며 국민과 정부 사이의 신뢰를 강조한다. 남북 관계에서도 신뢰를 말한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그것이다. 북한과는 작은 것에서부터 신뢰를 쌓아 통일의 기반을 다지겠다고 한다.

 외교도 신뢰외교를 강조한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천즈리(陳至立)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의 예방을 받았을 때 『논어(論語)』에 나오는 ‘무신불립(無信不立·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을 거론하며 “신뢰가 굳건하다면 양국 간의 어떤 어려움도 풀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에도 ‘장사를 함께하기 전에 먼저 친구가 되라(先交朋友 後做生意)’는 말이 있다. 서로 믿을 수 있는 친구가 된 뒤에야 이익을 같이 도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중국 비즈니스를 오래 한 이들이 체득한 경구(警句)다.

 박 대통령은 방중 시 중국과의 신뢰를 어떻게 쌓아야 할까. 시 주석과는 이미 우정이 쌓여 있다. 이번 만남에선 솔직한 대화로 그 신뢰의 깊이를 더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관건은 중국 보통 사람들과의 신뢰를 어떻게 다질까 하는 점이다.

 중국 존중의 마음을 담은 중국어 연설도 한 방법이다. 이와 함께 중국의 라오바이싱(老百姓·일반 인민)과 스킨십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역대 우리 대통령의 경우 이제까지의 방중에서 일반 중국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린 적은 없었다.

 반면 중국의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는 2007년과 2010년 두 차례 방한 시 한강 둔치에서 아침운동을 나온 우리 시민들과 어울려 함께 조깅을 하고 배드민턴을 치는 등 적극적인 공공외교(公共外交)를 전개한 바 있다.

 박 대통령으로선 어려운 시절 큰 정신적 도움을 준 중국 철학자 펑유란(馮友蘭)의 베이징 고택(古宅)을 들러 독서인(讀書人)의 모습으로 중국인과 교류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펑유란이 『중국철학사 신편(新編)』을 쓰며 만년을 보낸 베이징대 캠퍼스 내 연남원(燕南園)은 마인추(馬寅初) 등 여러 중국 대학자의 체취가 배어 있는 곳이다.

 베이징의 서민들이 찾는 짜장면 집에서 서울과 베이징의 짜장면 맛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2011년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이 베이징의 허름한 식당을 찾아 짜장면 외교를 펼친 적이 있지만 적어도 짜장면에 관해서는 우리가 할 말이 더 많지 않겠는가.

 스포츠외교도 추천하고 싶다. 탁구 애호가인 박 대통령이 탁구에 관한 한 세계 최강인 중국의 유명 선수들과 어울려 스매싱을 하는 모습은 중국인의 무한관심을 이끌어 낼 것이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이 2008년 방일 때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본의 유명 탁구선수와 게임을 한 것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다.

 신뢰를 쌓는 데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중국에 ‘그 말을 듣고 그 행동을 본다(聽其言 觀其行)’는 말이 있듯이 우선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다음은 그 신뢰가 한 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입증돼야 한다는 점이다.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그러나 한 번 쌓인 신뢰는 좀처럼 무너지지 않고 박근혜정부가 열어 갈 새로운 한·중 관계 20년의 굳건한 토대가 될 것이다. 박근혜-시진핑의 한·중 관계 5년을 규정하는 키워드로는 신뢰가 마땅하다.

유상철 중국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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