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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 원로 가는 길 수놓은 화사한 분홍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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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화단(畵壇)의 큰 어른 두 분이 공교롭게도 같은 날(8일) 별세했다. 우성(宇城) 변시지(87), 남천(南天) 송수남(75) 화백이다. 그제 저녁 들른 송수남 화백의 신촌 세브란스병원 빈소는 여느 상가와 분위기가 달랐다. 영정은 예쁜 분홍색 꽃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바닥에도 형형색색 꽃바구니가 즐비했다. 고인은 “내 장례식엔 모두가 화사한 복장으로 꽃을 들고 참석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한다. 예의인지 유지(遺旨) 거역인지 접객실의 문상객들 옷차림은 검은색·회색 위주로 ‘화사한 복장’과 거리가 있었지만.

 신문사 대선배가 1983년 대통령의 버마(미얀마) 방문에 취재기자로 동행했다가 아웅산묘소 폭파사건 때 부상을 당했다. 귀국해 병원에 입원한 선배를 한 후배 기자가 병문안했다. 꽃의 예법에 무심했던 후배 기자가 가져간 것은 한아름 흰색 국화꽃 다발이었다. 두고두고 신문사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는 해프닝이다. 꽃에도 제자리가 있고 격(格)이 있는 법인데, 고(故) 송수남 화백의 이례적인 상가 풍경은 생애 말년 ‘꽃의 화가’로 일대 변신을 꾀한 덕분일 것이다. 고인의 화려한 꽃그림은 내로라하는 집안 규수들도 혼수감으로 탐냈다.

 예술의 본질을 ‘낯설게 하기(Defamiliari zation)’에서 찾기도 한다. 익숙한 것을 생소하게 만들고, 일상(日常)을 비(非)일상으로 느끼게 만드는 기법이다. 죽음은 늘 누군가를 찾아다니니 장례식은 일상이다. 장례식 절차나 흰색 국화꽃도 일상이다. 그러나 송 화백 빈소의 화사한 분홍색 꽃과 꽃바구니는 비일상이다. 과연 대작가다운 작별 의식이요, 생의 마지막 작품이라 할 만하다.

 얼마 전 일본 도와다(十和田)시 현대미술관을 찾았을 때도 ‘낯설었’다. 미술관에선 ‘꽃(Flowers)’이라는 주제의 특별전(4월 27일~9월 8일)이 열리고 있다. 구사마 야요이, 나라 요시토모의 출품작도 보였지만 한국 작가 최정화(52)·김창겸(52)의 작품을 만날 수 있어 더 반가웠다. 김창겸의 미디어아트 ‘거울의 기억(Memory in the Mirror)’은 거울 속 사람·풍경과 어항의 물고기가 끊임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존재와 무(無)의 경계가 무너져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앞다리를 번쩍 든, 온몸이 꽃인 말을 묘사한 최정화의 설치미술 ‘Flower Horse’ 역시 꽃과 말을 낯설게 만든다.

 하루하루 보내는 일상이 다가 아니라는 것, 생이 그렇게 지겹지만은 않다는 것, 다른 눈으로 보면 달리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누군가는 끊임없이 알려주어야 한다. 그 지점에 예술이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거장들은 하나 둘 세상을 뜨지만 후배들이 쑥쑥 커 뒤를 받치기에 근심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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