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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추은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가을 햇살이 등으로 가득히 와서 안으로 전신을 이갠다.
저리도 맑고 파아란 하늘에 전율이 일 것 같다. 또 하나 세월의 굴레를 돌면서 뉘우침인양 알싸한 아픔을 상큼 씹어보는 맛.
가을은 「샐비어」의 빨간 정렬을 못다 배운 탓으로 늘 아쉬운 것인지 모른다.
팔월한가위 어릴 때처럼 마냥 즐겁지 않는 명절, 역시 어른들에게는 하나의 부담이 돼 버린 현실 때문이 아닐까.
손을 꼽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지난날, 딸이 많은 집안에, 어머니는 그날이 얼마나 골몰했을까, 이제사 생각 키운다.
요즘은 달라 그 때는 손수 우리들의 옷을 만드셔야 했다. 딸 다섯의 뒷바라지는 여간한 일이 아니었고 모두가 그만 그만한 또래여서 행여나 내 몫이 형보다, 동생보다 못하랴 곁눈질로 겨루는 경쟁만 해도 보통이 아니었다.
『쓸데없는 가시나들만 많아서….』
그럴 때마다 입버릇처럼 뇌시던 외할머니의 손길은 매양 바빴고 또한 즐거우셨다.
새벽이슬에 한마당 가득히 널려 있는 우리의 때때옷, 빨간「샐비어」가 옷 무게로 눌리어 살며시 고개 숙여 있었고 숯불을 피워 차례로 다리미질이 시작되면 기다리지 못해 급하기만 해서 동동 발을 굴렀던 우리.
노랑저고리 홍치마보다 같은 색으로 무늬가 멋있게든 「글로시·실크」(하부다에)로 깨끗이 가꾸어진 우리는 나비처럼 꽃처럼 행복해 있었다.
집안은 늘 웃음의 꽃동산, 그때마다 아버님은 딸 부자된 기쁨을 한껏 자랑하셨다.
바구니에 가득히 담긴 송편·햇과일·밤새만드신 맛있는 음식들, 먹어도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 듯이 덤비던 우리, 이제는 모두가 뿔뿔이 제 갈길에 바쁘다.
그리고 성묘 길에 오른 우리는 한 무리의 참새떼. 밤송이를 줍고 곱게 흐르는 냇가를 거너고 밭이랑 길을 깡총 토끼처럼 뛰어서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 앞에 다다른다.
석류가 붉게 여물고 소담히 달린 감나무가지가 탐스럽던 산지기집, 초가지붕, 휭하니 넓기만 하던 마당이 신기하기만 했던 옛날, 이제는 그 산소마저 도시계획에 희생이 돼버렸다. 소위 근대화의 발굴 속에 묻히고 말았다.
고향을 떠난 지 20년, 어린 날을 더듬다보니 가슴이 뭉클해 온다.
추석이면 군데군데 묻혀있는 온갖 추억들,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 이웃의 흥겨운 웃음, 가족끼리 친척끼리 모여서 마냥 즐겁던 우리의 풍속이 자꾸만 잃어져 가는 것이 아닐까.
정성들인 수고, 사랑의 입김은 자꾸만 허례와 허식의 악용 속에 자취를 감추고 더 먼날 우리들의 아이들의 추억 속에 과연 무엇을 남겨 줄 것인가?
모두가 「인스턴트」시대가되고 말았으니 아무래도 우리에게 우리의 고유한 전통의 멋이 있어야겠다.
한가지라도 뭔가 가슴 흐뭇이 남겨줄 사랑의 추억이 있어야겠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가을날 길을 가다 눈 여겨 보이는 낮선 집 앞마당 아니면 넓은 공지에 빨간「샐비어」가 피어 있으면 가슴속으로 치미는 그리움이 있다. 어릴적 행복했던 그날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길목에 우두커니 발길을 멈춘다.
가을은 한가위를 고비로 해 또 하나의. 낮선 곳에 나를 밀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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