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식의 똑똑 클래식] 오페라에 가사 한 줄도 없이 유명세 탄 나비부인 '허밍코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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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나비부인’ 공연 모습.

“맑게 갠 어느 날, 하얀 연기와 함께 하얀 배를 타고 그이가 올 거야. 멋진 그가 나를 부르며 길을 올라올 때, 나는 대답을 않고 숨을 거야. 그러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버릴지도 몰라. 그런 날이 꼭 올 거야.” 나비부인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 ‘어떤 갠 날’의 가사다. 초초상의 간절한 소원대로 핀커톤은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라 결혼한 그의 부인과 함께다. 오호 통재라.

춘향전에서 고을의 사또 변학도는 장원급제를 꿈꾸며 한양으로 가 소식이 없는 이몽룡을 기다리는 춘향에게 수청을 요구하지만 춘향은 이를 거부하고 감옥을 택한다. 핀커톤을 기다리는 초초상에게 야마도리 공은 남자가 3년이나 오지 않은 것은 이혼이나 다름없으니 자신에게 시집을 오면 편하게 살 수 있다고 끈이지 않고 유혹한다.

춘향전의 이몽룡은 자신의 아이도 갖지 않은 비천한 신분의 춘향을 다시 찾아와 감옥에서 구해내고 행복하게 산다. 핀커톤은 자신의 아이만 되찾으러 왔을 뿐 그녀의 생사에는 관심조차 없다. 핀커톤의 비인간적 면모는 단지 여인에 대한 비정함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집안의 하인들이 자신에게 소개될 때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첫째 허수아비, 둘째 허수아비’라고 명명하는가 하면 일본의 음식이나 예절을 철저히 모욕하고 초초상의 친척까지도 모독한다.

이러한 핀커톤의 제국주의적 성향은 그의 아내와 함께 돌아와 그의 자식을 데려가는 것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것이 아이에게 좋다는 이유는 단지 그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에 속했다는 자신의 우월성에 기반한 것이고 이것은 결국 초초상이 살아야 하는 존재의 이유를 무너뜨린 것이다.

핀커톤과의 사랑을 위해 친척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로 개종했던 초초상은 죽음을 결심하고는 다시 불단 앞에서 예를 갖춘다. “하늘에서 온 내 아기야, 이 엄마의 마지막 얼굴을 똑똑히 기억해다오.” 마지막 작별의 노래 ‘안녕, 아기야’를 부른 초초상은 그의 아버지가 남겨준 단도로 자신의 목을 찌른다.

그 단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명예롭게 살지 못할 바에야 명예롭게 죽으리라.” 과연 그녀의 죽음은 명예로운 것이었을까. 나비부인에는 주옥 같은 아리아들이 유난히 많다.

제2막에서 초초상과 단 둘이 남은 샤플레스 영사가 편지를 꺼내 읽는 장면에 나오는 편지의 이중창 ‘친구여 보시오’는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샤플레스 영사와 한 구절마다 조급하게 대응하는 초초상의 노래가 어울리는 아름답고도 슬픈 노래다. 그렇게 기다렸던 핀커톤이 탄 배가 항구로 들어오는 것을 목격한 순간 초초상과 하녀 스즈키가 정원의 꽃을 따다 방에 뿌리며 부르는 ‘꽃의 이중창’ 또한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놓쳐서는 안될 노래다.

그리고 또 하나. 그들이 밤새 배를 기다리는 동안 멀리 부두에서 들려오는 어부들과 인부들이 휴식을 취하며 부르는 일명 ‘허밍 코러스’는 오페라에서 가사 한 줄도 없이 유명세를 타고 있는 유일한 곡이다.

김근식 음악카페 더 클래식 대표 041-551-5503
cafe.daum.net/the Clas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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