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이홍구 칼럼

큰 이웃 중국에 거는 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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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자 광분한 북한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는 전쟁의 위기를 넘기는 데 일단 성공하였다. 북한은 그 체제의 특수성과 예외성 때문에 치명적 파국을 자초하는 듯싶은 병리적 성격을 보일 때가 없지 않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이해타산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 번 더 보여주었다. 이번 사태는 국내외에서 궁지에 몰린 북한이 황급히 선택한 극단적 자구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북한의 선택은 한반도 위기를 풀어갈 가장 중요한 열쇠는 북한이 아니라 중국이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켰을 뿐이다.

 사실, 지난 100년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은 상당 부분 열강의 손에 좌우되어 왔다. 오늘의 상황 역시 그 연속선에서 전개되고 있다. 150년 만에 초강대국 위치에 복귀하고 있는 중국이 한반도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는 사실을 중국 스스로가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양 날개로 끼고 있는 미국, 유라시아대륙과 태평양 사이의 중원을 차지한 중국이 21세기의 초강대국으로 작동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번 주말에 열리는 오바마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정상회담에 우리는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동서냉전이 독일문제의 해결로 막을 내렸듯이 21세기 아시아·태평양시대의 개막은 한반도문제 해결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동남아지역에서 예외국가로 남아있던 미얀마가 아시아시대에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과감한 수순을 밟고 있는 시기에 핵무기 개발로 체제의 예외성을 담보하겠다는 북한의 입장은 분명 시대착오적 고집이다. 더구나 미국과의 협상으로 모든 어려움을 해소하겠다면서 그들의 핵무기 개발로 인해 불가피하게 조장될 동아시아 핵무기 도미노현상으로 가장 큰 손해를 입게 되는 것이 중국이란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가 수용하는 유일 핵보유국의 지위를 포기하면서 국경 100㎞ 지역에서의 핵폭발 실험을 감내하는 초강대국이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의 논리를 미·중 정상회담에 앞서 북한이 돌출행동으로 부각시킨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세력균형에 걸맞은 초강대국 외교정책을 추진하려면 오래된 관행이나 수동적 자세에 안주할 수 없다는 적극적인 전략을 중국의 새 지도부는 추진하고 있는 것 같다. 세계 각 지역의 위급한 사안에 얽혀 여념이 없는 미국보다도 아시아 최대 현안인 한반도문제 해결에는 중국이 실마리를 선도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미국의 케리 국무장관이 4월 방중 때 중국이 주도하는 6자회담을 재개하고 2005년에 합의한 9·19공동성명을 문제해결의 기초로 삼기에 합의한 것은 바로 중국의 선도적 위치를 전제한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는 중국의 초강대국 역할에 시금석이 된 것이다. 중국의 권고를 수용하여 생존을 보장받든지 아니면 중국과의 우호적 관계에 종지부를 찍을 것인지, 선택을 강요당하게 된 북한은 역시 실리 위주의 결정을 내리지 않을까.

 김정은의 특사 최용해에게 시진핑 주석은 분명한 원칙을 제시하였다. 한반도문제 유관 국가들이 6자회담을 진전시켜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한반도와 동북아의 적극적인 평화·안정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이징대 왕이저우(王逸舟) 교수는 북·미 관계 정상화, 주변 강대국들의 체제안전 보장, 경제원조라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북한은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중앙SUNDAY 5월 26일자 5면). 이러한 입장은 북핵 폐기 및 북한의 안보우려 해소, 관계정상화, 대북 경제지원을 명시한 9·19공동성명과 정확히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그간의 우여곡절은 서로 잊는 것이 상책이다. 결국 하나의 공동체 안에 두 국가체제의 평화적 공존을 처방한 1989년 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입각하여 남북이 합의한 일련의 공동목표를 되살려야 하겠다.

 20년 전과 달리 이번에는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문제의 두 국가 해결책(two state solution)에 적극적으로 무게를 실어줌으로써 아시아·태평양시대의 주춧돌을 함께 놓기로 뜻을 같이하고 있다. 이렇듯 동북아의 평화와 비핵화에 대한 당사국 간의 합의가 가능하다면 이를 현실화하는 구체적 절차와 수순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외교가, 특히 정상외교가 짊어진 역사적 책무라고 하겠다.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이 훤히 보이니 동행자들의 의지와 상호신뢰를 다져야 할 때다. 닷새 후의 오바마·시진핑 회담, 6월 말의 박근혜·시진핑 회담의 중요성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시아의 가장 큰 나라 중국의 미래지향적 결단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클 수밖에 없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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