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전의 구두닦이 정상용씨 고향에부임한 미군소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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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9년전까지 고향인 파주군봉일천리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고아가 미군소위가 되어 금의환향했다. 서부전선의 미제2사단 예하 15포병단1대대 B포대에 전속해온「찰즈·리·코번」소위(22)는 부임길로 주내면대추골에 잠든 부모의 산소를 찾아 머리를 조아리고 흐느껴 울었다. 미국서 갓결혼한 처 김금자씨와 나란히-.
『나는 여덟살 때 이미 미군부대에서「비공식적으로」근무했었지요. 이제는「공식적으로」재복무하는 겁니다.』홍안의「코번」소위는 자기의 기구한 운명을 한국말과 영어를 섞어가며 이야기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의 소년시절의 이름은 정상용-.
해방이듬해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두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네살때 엄마등에업혀 피난을 떠났다.「용주골」에 되돌아온 모자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다섯 살난 정군은 마을앞 웅덩이에서 헤엄을 치다가 지나가는 미군을보고「찹찹」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미군은 정군을 미군부대에 데려가 먹을것을주며 군복을 줄여입혔다.「코번」소위는 지금도 그때의「C·레이션」맛을 잊을수가 없다고 했다.
정군은 그미군의 호의로 부대안에서 얻어먹으면서「슈샤인」을 개업했다. 고객은 낯익은부대장병들. 하루수입이 2「달러」가 넘을때도 많아 어머니가 제일 기뻐했다.
그러나 행운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정든 미군들은 돌아가고 새로운 얼굴들이 오고, 그리고 또가고 오고…. 정군은 사단헌병대, 서울의 어느 미군부대, 다시 사단경리부등을 전전했다.
사단경리부에서 더부살이하면서 열한살난 정군은 부대앞 봉일천국민학교에 다녔다.
그를 남달리 귀여워하던 경리하사관「제리·로슨」씨는 출가한 자기누나에게 편지로 정군을 소개, 정군은 그녀와 양연을 맺게 됐다. 정군의 어머니도 아들의 장래를 생각, 반대하지않았다. 외삼촌뻘되는「로슨」씨도 만기가 되어 귀국해버렸다.
59년5월2일, 경리부의 한사병이 정군을 불러『너 정말 미국으로 가겠니?』하고 다짐했다.
『네-』정군은 힘을주어 대답했다.
이틀후 정군은 비행기에 올랐다. 그때 눈물로 아들과 생이별한 어머니는 3년뒤에 세상을떠났다.
「오리건」주「포틀랜드」에 사는 양부모「코번」씨내외와 두딸「주리]와「케이시」,그리고 외삼촌「로슨」씨는 정군을 혈육과 다름없이 사랑해주었다.
정군은「찰즈·리·코번」으로 창씨개명했다. 파란눈의 부모들 사랑을 받으면서「포를랜드」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 포병학교에 들어갔다.
지난 가을에 결혼한 처는 포병학교 시절에 사귄 유학생이었다.
이제 성년이 된「코번」소위의 머리에는 가끔 고향생각이 떠올랐다.「용주꼴」의 웅덩이,생부모가 잠자는 파주의 산천이 보고팠던 것이다. 지난2월초「워싱턴」주 포병신병훈련소교관으로 배치된 그는 전화로 국방성 포병감실을 불러『한국에 보내달라』고했다.
9년전의 정상용군은 지난 4윌9일「찰즈·리·코번」이란 이름으로 어깨에 노란색의 선명한 계급장을 단 미군소위가 되어 고국의 땅을 다시 밟았다.
하늘에서 처음 고국강토를 내려다보았을 때 그의 가슴은 뭉클했다.
어린시절을 부대주변에서 갖은 고생을하며 자란「코번」소위는 앞으로 미국에서 생활기반을 잡으면 자주 고국에 드나들면서 고아원을 차려 자기와 같은 과거를 가진 불쌍한 아이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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