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실홍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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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또비가오려나.푹가라앉은잿빛하늘이무겁게만보인다.
어제의비로 젖은땅에조심스FP가마니를깔고많지않은「메리야스」들을정리하고있을때다. 『이,애들러닝·샤쓰얼마요?·』
여인의 카랑카랑한목소리가가슴을섬뜩하게한다. 두달채못되는병아리상인생활속에서항상가슴두근거리게하는일은 사방한평도못되는내왕국을 찾는첫손님을맞는일이다.
○…혹시첫손님을 놓치는것은아닐까. 그로하여금하루종일우울한장사를 하게되지나않을까.그러고 보니어느덧나도 상인의습성에젖어든모양이다.
『70원?뭐가그리비싸요』손은여전히분별없이 아무거나뒤적이며입을비죽이는것이다.
『50원에줘요.50원도비싸…』속에서 할딱이는 분노와자존심을 그저좌선(좌선)하는수도사의심정으로누른다.『그렇게는어디가도못사요』『왜못사요.×대문시장가면4O원이라도사는데』-여인은 걸레조각버리듯 옷을내동댕이치고는 휭하니가버렸다. 가라앉은하늘에선 금시라도장대같은 소나기가쏟아질것만같다.<허량수·28·서울영등포구신풍동330번지7통6반조광호방>

<기다리는마음>
○…언제부터였을까?·스물아홉의나이에 어둡고초조로운그늘이 그이의얼굴에 어리기시작한 것은 결혼생활6년.한가정의가강으로서의 책임감과불안정한생활에서받는 중압감속에서어쩔수없이 느껴야되는불안과열등의식.
그런여건들이 나날이그이의얼굴에짙은 그늘을드리지만가난하다는것외엔 더없이선량하고정직한 그이.
○…결코능력이 없는게아니면서도 몇번인가 써본이력서가 구겨진자존심과 함께내던져질때「잉여인간」의비애를 불면과자학으로보내던 그이가오늘아침취직문제로 만날사람이있다며서두르기시작했다. 구두를닦고 조금은밝은표정으로아가의볼을두드리며 바삐나가는등뒤에서「낙타가바늘구멍으로들어갈만큼의가능성」을점치는마을도 조금은 가벼울수있었다.
○…잡히지 않는일손을 달래어빨래를하고 잔일읕끝내어도 저만큼전선주에 걸려있는태양.
하루가 너무길고지리하지만 좋은소식을안고 가벼운걸음으로 그이가돌아오길 기다리는마음은 자꾸만문밖에서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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