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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 노라노 통해 그 시대 ‘노라’들의 삶 보여주고 싶었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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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호 21면

다큐 ‘노라노’

디자이너 노라노(Nora Noh·85). ‘한국 패션 디자이너 1호’라는 영예로운 호칭에도 불구하고 한국 패션사에서 그가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노라노’를 찍기 전 김성희(38ㆍ사진) 감독에게도 그는 낯선 이름이었다. 1956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던 ‘신여성’의 존재를 김 감독이 재발견하게 된 건 2010년부터 약 3년간 노라노의 뒤를 좇으면서다.

‘한국 패션 디자이너 1호’ 노라노 다큐멘터리 만든 김성희 감독

“아직까지도 화장할 때 속눈썹을 붙이고 남들 앞에 민얼굴을 보이기 꺼리는” 디자이너 노라노. 그의 삶을 조명한 다큐는 24∼30일 서울 신촌 메가박스에서 열리는 제1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소개된다. 김 감독은 여성주의 문화운동 단체인 ‘연분홍치마’에서 활동 중이다. 용산 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2012)을 비롯해 ‘종로의 기적’(2010), ‘레즈비언 정치도전기’(2009) 등에 주요 스태프로 참여했다. 이 다큐가 첫 연출작이다.

‘노라노’는 노라노의 패션 인생 60년사를 정리한 전시 ‘라비엥로즈’ 기획 과정을 뼈대로 삼았다. 지난해 5월 열린 이 전시는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씨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서씨는 “코코 샤넬이나 소니아 리키엘, 비비언 웨스트우드는 알아도 내 나라의 디자이너는 모르는”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한국 패션사의 ‘뿌리’를 찾아 나선다.

서씨의 방점이 패션사에 찍혔다면 김 감독의 시각은 좀 더 포괄적인 것이었다. 패션사뿐 아니라 여성문화사적으로 의미 있는 인물을 발굴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나그랑 소매가 뭔지, 소니아 리키엘이 누군지 잘 몰랐던” 그가 지켜본 ‘여성 노라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한마디로 ‘잘난 여자’다. 1950∼70년대 대중문화사나 여성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데도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점이 안타깝다. 어린 나이에 결혼과 이혼을 하고 홀로 미국 유학을 다녀와 패션쇼를 열고 자기의 이름을 내건 의상실을 운영할 정도의 의지와 추진력은 억압적이고 봉건적이었던 시대 분위기를 감안하면 남다른 것이었다. 영화 속에도 나오듯 그의 삶은 ‘도망가지 않는 삶’이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한 번도 도망치지 않고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궤적이 감동적이었다.”

영화에는 노라노의 그 시절을 증언하는 여러 인물이 나온다. 최은희·엄앵란·최지희 등 노라노의 의상을 입고 영화를 찍었던 배우들을 비롯해 가수 윤복희, 김인자 한국심리상담연구소장 등 문화계와 학계 여성들이다. 이들은 “옷 입는 방법을 지금까지도 가르쳐주는 국보 같은 존재”(엄앵란), “선생님이 옷을 해주고 싶다고 했을 때 정말 영광스럽다고 생각했다”(김인자)며 노라노의 고객 이상 가는 팬을 자처한다. 이들이 노라노 못지않게 치열한 삶을 살았던 당대의 여성들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영화를 찍다 보니 그 시절의 ‘노라(Nora, 노르웨이 작가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주인공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일 수도, 우리 할머니일 수도, 우리 엄마 친구들일 수도 있는 그 시대 능력 있는 여성들의 존재에 궁금증이 생겼다. ‘노라노’는 그런 ‘노라’들에 대한, ‘노라’들을 위한 영화다.”

‘노라노’엔 실제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가거나 증언을 듣는 것 외에도 배우들이 나와 상황을 재연하는 형식이 부분적으로 쓰였다.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다큐에 시선을 붙들어두는 기법이다. 17세에 결혼해 시동생들 도시락을 싸고 늦둥이를 낳은 시어머니 수발을 드는 등 고된 시집살이에도 시부모의 눈에 결코 들지 못해 이혼해야 했던 과거, 5·16 군사쿠데타 때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취조를 받은 사건 등이 이런 기법으로 묘사된다. 중앙정보부에 연행되는 순간에도 화장을 하고 매니큐어를 칠하거나 취조실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는 침착하고 담대한 그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노라노’는 26일 오후 5시, 29일 오후 2시 두 차례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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