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 모과생각 158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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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숭례문 옆 신한은행 본점 화단에 서 있답니다. 지난해 12월 4일 오후 갑자기 찬비가 내리며 세찬 바람이 불었지요. 어 하는 새 나는 엄마 손을 놓쳐 버렸습니다. 떨어질 때 이마를 세게 부딪쳐 눈물이 찔끔 났지요. 황망해 엄마를 올려다보는데 마침 지나가던 아저씨가 저를 줍더군요. 아저씨는, 그러니까 그때부터 주인님은 사무실 책상 옆 하얀 종이에 나를 올려놓았습니다. 요놈 색깔 좀 봐. 냄새는 어떻고. 오가는 이들에게 내 자랑을 얼마나 하던지요.

 주인님이 신문사에서 일하니 가만히 있어도 세상 얘기가 다 들렸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리 싸우는지요. 별것도 아닌 걸로 죽이느니 살리느니 하더군요. 대선 때는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인정받고 싶으면 상대를 먼저 인정하면 되는데 그걸 못하더라고요. 엄마 품에서 같이 자란 내 형제들도 다 모양이 제각각인데 말이죠.

 앞뒤 다른 이들도 꽤 봤어요. 공직에 나가려다 지난 일이 드러나며 이름에 흙칠하고, 태평양 건너가 나라 이름에 먹칠하고…. 힘이 되는 얘기도 많았지요. 일본 최고 문학상인 아쿠다가와상을 받은 구로다라는 분은 글쎄 75세 할머니더군요. 와세다대를 나왔는데 조직에 묶여 글 쓰는 시간을 빼앗기기 싫어 시급 알바 인생을 택했다지요.

 신문사 편집국에서 펼쳐지는 신공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타계하던 날입니다. AP통신이 오후 9시46분 1보를 전했지요. 그 뒤 47분 만에 9641자를, 51분 만에 1만5480자를 쏟아내며 네 개 면을 만들더군요. 한 가지가 아쉽네요. 1911일 만에 돌아온 숭례문을 보지 못했거든요.

 158일 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지난 9일 오후 11시, 퇴근하려던 주인님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때가 됐구나 생각했지요. 다음 날 주인님은 주말농장 밭둑에 나를 내려놓고 흙이불을 덮어 줬습니다. 하루 종일 햇볕 드는 자리예요. 새 친구들이 생겼답니다. 낮엔 민달팽이·나비·민들레·냉이, 밤엔 별·달·바람…. 지금 내 몸에선 새 생명이 꼬무락거립니다. 놀라운 날들입니다. 고개 들어 보세요. 저 신록.

글·사진=안충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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