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화마에 고단했던 600년 … 숭례문 복구 도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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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숭례문 광장과 세종로,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된 숭례문 복구 기념식.

지난 2011년 2월 10일 오후 8시 45분, 600여 년 역사 속에서 묵묵히 남대문로를 지키던 국보 제1호가 4시간여 만에 잿더미로 변했다. 벽돌로 쌓아올린 기단부 위 누각 2층에서 발생한 불은 밤 11시를 넘어가자 2층 누각 전체로 번졌고, 자정을 넘기면서 화력이 더욱 거세졌다. 2층 누각 지붕은 새벽 0시 45분께부터 붕괴되는 기와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새벽 1시 이후 사나워진 화마는 결국 1층 누각까지 집어삼키고 말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숱한 전란을 겪으며 600여 년 역사를 지켜봐 온 숭례문(崇禮門). 국보 제1호라는 이름표 아래 방치돼 온 숭례문은 그 처참한 밤에도 홀로 불길에 맞서야 했다. 관리인도, 스프링클러 등 기본 소화장비도 없었다. 불에 취약한 목조 건물임에도 숭례문이 가진 것이라곤 소화기 8대와 상수도 소화전뿐이었다. 국보 제1호가 갖춘 화재 방지 시스템이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지난 2010년 숭례문 복구 현장에 대장간을 설치, 전통 철물 제작을 지원한 포스코.

600여 년의 역사를 무너뜨린 방화범은 지난 2006년 창경궁에도 불을 질렀던 69살 채모씨였다. 경기도 일산에 위치한 자신의 집이 재개발되면서 시공사 측으로부터 토지 보상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자 지난 2006년 창경궁에 불을 지른 채씨는 이 방화사건 때문에 추징금 1300만 원까지 선고받자 불만을 품고 또 이런 범죄를 저지른 것이었다.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돼 있던 숭례문 누각에 채씨가 접근할 수 있었던 건 2007년 7월과 11월 두 차례 숭례문을 사전 답사하는 치밀함 덕택이었다. 채씨는 미리 준비한 알루미늄 사다리를 이용해 2층으로 올라갔고 시너를 담아온 1.5L 페트병 3개 중 한 개를 바닥에 뿌리며 계획을 이행했던 것이다. 일회용 라이터로 옆 쪽에 불을 붙인 뒤 유유히 사라졌던 채씨. 그가 현장에 던져놓고 온 라이터는 검거에 중요한 단서로 작용했다.

 일명 남대문(南大門)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국보 제1호 숭례문. 서울의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위치해 붙여진 이름이다. 1396년 태조때 축조된 이 서울 도성의 정문은 1398년 2월에 준공됐다. 그리고 지난 2008년 방화로 소실된 숭례문은 약 5년 3개월의 복구 공사를 거친 뒤 지난 4일 복구 기념식을 거행하며 다시 국민과 마주할 수 있었다.

 숭례문 복구에는 총 245억여 원이 투입됐고 연인원 3만5000여 명이 동원됐다. 신응수 대목장, 이재순·이의상 석장, 홍창원 단청장, 한형준 제와장, 이근본 번와장, 신인영 대장장 등 중요무형문화재기능 보유자가 참여했고, 국민도 목재 1만855재를 기증하며 지키지 못한 숭례문에 비통함을 전했다.

 형체를 잃어버린 국보 1호 앞에 국화를 내려놓으며 오열하던 시민처럼 숭례문의 소실을 안타까워 한 기업이 있으니 바로 포스코이다.

 지난 2005년 9월 14일 문화재청과 ‘한 문화재 한 지킴이’ 협약을 맺은 포스코는 지난 2010년 6월 ‘숭례문 복구 전통 철물 제작’ 지원 협약을 체결, 복구 사업을 지원해왔다. 철강 전문기업 포스코의 지원군이란 역시 철물이었다. 숭례문 복구용 전통 철물제작에 필요한 철광석 10톤을 무상으로 내놨고, 철물 생산 및 대장간 설치 운영에 필요한 사업비 3억 원도 후원하며 세계적인 제철 기업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포스코의 관심은 전통 계승으로도 기울어졌다. 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학교 보존과학연구소와 함께 단절됐던 전통방식의 철물제작 기법을 연구했고 이렇게 제작한 철물은 복구 현장의 대장간 설치로 실제 숭례문 재건에 쓰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포스코는 숭례문의 정통성 보유와 함께 우리 민족 전통의 철물 제작기법 전승에 기여한 셈이다.

 임은경 문화재청 숭례문복구사업단 주무관은 포스코의 숭례문 복구 지원에 대해 “포스코의 도움으로 숭례문이 더욱 전통에 가까운 방식으로 복원될 수 있었다”라고 전했다. 이어 “우리나라 철강산업을 일으킨 포스코가 숭례문 복구용 철물을 제작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도 큰 의의가 있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박지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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