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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지 않는 신발에서 희망 찾아내는 전신마비 시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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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사무실 책상 위에 신간 시집 두 권이 놓여 있다. 하나는 한국시인협회가 엮은 『사람』이라는 시집이다. 흥선대원군에서 이태석 신부까지 근·현대 주요 인물 112명을 시로 표현했다. 그러나 “근대사 속 인물이 남긴 빛과 그늘을 문학의 눈으로 살피는 작업”이라는 시인협회 측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승만·박정희 등 몇몇 인사에 대한 과도한 칭송이 문제가 됐다. 김요일·함민복 등 시인 55명이 반발하고 나서자 시인협회는 어제 『사람』을 전량 회수하고 예정된 출판기념회도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꽤 드문 형태의 필화사건이 벌어진 건데, 사실 문제가 된 몇 편 외에는 괜찮은 시들이 대부분이다. 시작(詩作)에 참여한 시인 113명은 선의로 응했다 애먼 일을 당한 꼴이 됐다. 그나마 신속히 조치하길 잘했다. 새삼 시와 정치, 시와 권력의 거리와 길항(拮抗)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문학의 효용과 가치를 말할 때 자주 회자되는 구절이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 첫 대목이다.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인은 시집 한 권에 3000원이면 너무 헐하다고 생각하다 국밥 한 그릇 값임을 떠올리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라고 자문한다. 읽노라면 국밥 한 그릇 아니라 1000그릇 이상의 감동과 따스함이 스민다.

 책상 위 또 한 편의 시집은 청주시에 사는 전신마비 장애 시인 황원교(54)씨의 『오래된 신발』이다. ‘24년째 / 흙 한 톨 묻혀보지 못한 채 / 색깔은 바랬어도 길이 잘 들고 / 거죽과 밑창이 말짱한 갈색 편상화를 신고 / 오늘도 휠체어를 타고 길을 나선다…’. 시인은 1989년 교통사고로 중증장애인이 됐다. 표제시 ‘오래된 신발’은 땅을 딛지 않아 닳을 기회조차 없는 신발을 노래한다. 자원봉사로 자신의 수발을 들다 결혼에 이른 아내(유승선·47)마저 유방암에 이어 지난해 말 난소암 3기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니 이중삼중 불행에 둘러싸인 셈이다. 중증 재생불량성 빈혈을 앓던 남동생도 재작년 먼저 세상을 떴다.

 그런 황 시인에게 시는 희망이다. ‘맨 밑바닥까지 / 떨어져 보지 않은 자 / 아픔을 말하지 말라! / 엄동설한의 암벽에도 / 봄이 오면 / 노란 생강나무 꽃은 피어나리’(‘빙폭’ 부분). 어제 시인에게 전화를 하니 “인생이 아무리 나빠 보여도 살아 있는 한 희망이 있고, 결코 그 희망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스스로 다짐하는 말일까, 세상에 대고 외치는 말일까. 가끔 홍진(紅塵) 세파에 시달리긴 하지만, 그래도 시는 누군가에겐 양식이고 누군가에겐 희망이다. 나눌수록 많아지고 커지는 양식이고 희망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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