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시론

재건축 필요한 '신뢰 프로세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안희창
통일문화연구소 전문위원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 기조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탄생할 때만 해도 그런 대로 설득력이 있었다. 설계사인 윤병세 외교부 장관의 설명에 따르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급격하게 변동하지 않고, 안정된 폭 내에서 안보도 다지고 대화도 해나가겠다는 것이다. 윤 장관은 “암 치료약도 약 성분을 어떻게 배합하느냐가 중요하다”면서 “김대중정부나 이명박정부는 한쪽 성분을 많이 쓴 것 같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이 프로세스는 세 가지 정책 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남북기본합의서 등 남북 간 기존 합의를 존중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약속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맺어진 합의에 담긴 평화와 상호 존중의 정신을 실천해 남북 간의 신뢰를 쌓아가겠다는 것이다. 둘째로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과 별개로 투명성만 확보되면 꾸준히 해나가겠다는 점이다. 셋째는 북한도 변해야 하지만 ‘남한도 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북한에 지원을 하면 북한이 알아서 개과천선할 것으로 본 햇볕정책이나 북한의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데만 방점을 둔 MB정부의 대북정책보다는 훨씬 고민의 흔적이 많은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지난해 말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가다듬기 위해 논의에 논의를 거듭했을 시기에 예상됐던 미국과 북한의 대외정책이 급변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오바마 2기 정부가 대북 대화론자인 존 케리를 국무장관에 임명하자 미국이 북핵 문제 등을 북한과의 대화를 통해 해결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북한이 진정성 있게 변화하지 않는 한 북한과 대화를 하지 않는다는 오바마 1기 때의 ‘전략적 인내’가 수정될 것으로 여겨졌었다. 북한도 지난해 12월 중순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는 기업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6·28 개혁조치’를 시행 중이었고, 미국의 디즈니 만화 캐릭터들이 방송을 탔다. 기존의 고립에서 탈피해 개방의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됐었다.

 그러나 올 1월 말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한 유엔 제재가 나오자 북한은 협박 모드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김정은 체제의 안정을 다지기 위해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위협을 4개월간 가해 왔다. 미국은 미국대로 북한의 이런 강경 움직임을 잘 활용해 왔다. ‘아시아로의 회귀’를 선언한 미국에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준 격이었다. 최신예 B2 폭격기, F-22 전투기, 핵잠수함이 한국에 배치했고, 니미츠 핵항공모함이 한국 근해에서 훈련을 했다. 미국과 북한 간 강(强) 대 강 대치는 박근혜정부 내에서 한·미 군사동맹 강화와 대북 강경을 주장하는 측의 발언권을 세게 만들어주었다. 개성공단 철수 당시 북한에 하루의 시간적 여유를 주면서 답변을 재촉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정부 외교안보 당국자들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강조하니 의아스러워지는 것이다. “우리의 확고한 안보 태세와 억지력을 믿는 것이지 북한을 믿는 것이 아니다”라는 박 대통령의 발언과 신뢰 프로세스와는 엇박자가 아니냐는 질문이다. 남한에 비해 국력이 40분의 1인 북한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for-tat)’ 식으로 대처한다면 양측 사이에 신뢰가 조성되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인도적 지원에 대한 액션플랜 없이 ‘나쁜 행동에 보상이 없다’는 원칙에만 매달린다면 북한 붕괴 시까지 ‘신뢰’가 쌓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도 ‘6·25전쟁은 북침’이라고 우기는 체제와 협상을 할 수밖에 없다면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리처드 루거 전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이 그제 중앙일보-CSIS 세미나에서 한 “북한에 대한 말을 줄여라”라는 권고도 하나의 예다.

안희창 통일문화연구소 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