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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의 월드 뷰

세계 도약 보증수표 '다이내믹 코리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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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출범 2년이 지난 지금 노무현 정부는 한국을'정상적인'민주주의 궤도에 올려놓았다. 선거운동 기간에 나타났던 혼돈과 집권 초기의 동요는 안정적인 흐름으로 접어들면서, 오랜 민주주의 전통을 지닌 국가의 정치와 흡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국에 이는 성공이라 할 만하다. 제도가 견실하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은 노 대통령이 보여주는 자제력과 현명해진 야당, 그리고 특히 시민사회의 새 주체들이 힘을 얻으면서 가능해졌다. 한국의 운명은 더 이상 청와대나 국회, 과거 국가의 운명이 재단되던 밀실 속에 맡겨져 있지 않다. 정치인들은 이제부터 기업인.미디어.교회.검찰.변호사.노조.인터넷사이트.NGO(시민이나 소비자를 옹호하는 비정부기구)와 마찬가지로 국가 운명을 이끌어가는 한 주체에 불과하다.

헌법재판소의 과거와는 다른 독립성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싶다. 헌재는 자신의 결정, 특히 여성의 지위에 대한 결정으로 권력 간 균형과 법치국가라는 개념을 공고히 했다. 정치적 결정에 있어 높아진 투명성과 부패의 감소는 이처럼 다양한 사회주체들의 상호작용 때문에 가능했다. 반부패법은 만약 검찰이나 NGO 같은 감시자가 늘어나고 동시에 그들의 자율성이 확장되지 않았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는 효과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한국이 이렇게 빨리 정치적 사막에서 성숙한 민주국가로 바뀔 수 있었던가? 일반화된 교육이 시민 참여를 가능케 한 결정적인 요소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민에게 국가에 기대지 않도록 자율성을 가져다준 경제 발전 또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여기에다 한국 사회의 특수한 요소들을 덧붙여야 한다. 그중에는 특히 100여 년 전부터 한국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부터 반성하게 하고, 같은 생각이나 동일한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함께 평화롭게 사는 법을 가르친 종교의 다양성을 빼놓을 수 없다. 아시아국가 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 예외적 다양성 때문에 아주 특이한 한국의 민주화는 다른 아시아국가에서는 쉽게 재생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과격한 이데올로기적 성향에 식상한 여론 덕분에 지난 2년 동안 집권당과 야당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대통령 선거 결과를 재검표 주장으로 문제 삼았던 야당은 이후 공존의 법칙을 달게 받아들이게 됐다. 집권당에 대한 적의를 누그러뜨렸으며, 노 대통령 측에서도 선거운동 기간 토해냈던 전투적인 수사 대신 더 실용적으로 일상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매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점점 더 성숙한 민주주의의 전형인 '온건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 목격됐다. 노무현 정부 초기 권력으로부터 욕을 듣던 기업총수들은 지금은 '위대한 애국자'로 인정받고 있다. 노조도 점점 자세를 바로잡고 있다. 더 이상 기업 안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은 없어졌다. 경제정책은 국제적 기준에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됐다. 대북관계는 더 이상 국가와 정파들을 분열에 빠뜨리지 않는다.

야당과 마찬가지로 여당도 북한의 위험성과 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미국의 핵심적인 역할을 인정한다. 북한에 대한 이러한 공감대는 중국의 태도에 의해 더욱 굳어졌을 것이다. 많은 한국인이 오랫동안 친구로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한 중국은 한국 영토에 대한 기이한 봉건군주적 지위를 들먹이며 영토 확장에 대한 속마음을 드러냈다. 달리 표현하자면, 중국 공산당원들은 북한 영토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북한이라는 고객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조잡한 술책이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북한의 미래를 놓고 중국과 벌이는 협상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 것인지가 드러났다. 그러나 이 외교적 안개는 아주 빨리 걷혀야 할 운명에 처해졌다. 집권 2기를 맞은 부시 행정부가 임기 종료 전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최우선적인 목표는 북한의 비핵화만이 아니다. 미국 지도자들은 평양의 폭정 종식도 같은 무게로 취급하려 한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어떤가? 양국 정부가 벌이는 문화교류 활성화 노력은 칭찬할 만하다. 한국이 전통과 아방가르드를 결합할 수 있는 많은 뛰어난 예술가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문화교류가 동시대 창작물보다 민속적인 것에 집중되고 있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반대로, 한국 정부가 일본식민지 시대의 과거사 문제를 다시 들추려 하는 것은 보는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한편으로, 역사를 바로 알고 그것을 가르치는 것은 올바른 일이다. 하지만 이는 이러한 노력들이 사안의 복잡성을 잘 정리하고 그것들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복원시킬 때만 맞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을 더듬는 이 작업이 학문적 정신에 따라 움직이는 독립된 학자들에게 맡겨지도록 바랄 뿐이다. 이런 와중에 한국사람과 일본 사람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데서부터 거대한 혁신이 일어났다. 정치 분야에서가 아닌 미디어 분야에서였다.

일본에서 방영된 한국 TV드라마 '겨울연가'의 눈부신 성공과 거기에 출연한 젊은 주연배우들의 카리스마는 일본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50세가 넘은 일본 여자들이 배용준에게 푹 빠졌다. 그들은 배용준을 이상적인 사윗감으로 꼽았다. 이처럼 국가 간의 관계는 정치 지도자들의 멋진 제스처보다 영화.TV.스포츠 등이 주는 이미지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한다.

몇몇 한국 기업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도 한국을 기분 좋게 만들고 있다. 한국 경제가 과거처럼 빠른 리듬으로 성장하고 있지 못한 것은 경영 잘못이나 중국과의 경쟁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한국 경제가 그만큼 성숙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좀 더 넓은 안목으로 본다면, 지금 세계시장에는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한국 상품이 많아졌다. 옛날처럼 가격이 싸서가 아니라 품질이 좋고 기술력이 뛰어난 제품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한국은 지금 이러한 상품들의 인지도 덕분에 세계경제의 선두그룹에 속한다. 이는 장기적으로 볼 때, 과거 하청 생산이나 한 가지 제품을 대량생산해 오던 것보다 더 확실한 번영의 보증수표다. 한국 경제의 경이적인 성공은'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해묵은 이미지를 대신하는, 처음에는 구호에 불과했던 '다이내믹 코리아' 슬로건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게다가 한국의 유명 상품들은 국제시장에서 한국 문명의 이미지를 대변한다. 서양에는 아직도 한국 문명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다. 문명국가로서의 한국이 머잖아 국제무대에 떠오를 날이 분명 도래할 것이다.

정리=박경덕 파리특파원

*** 기 소르망은

▶ 1944년 프랑스 출생
▶ 64년 파리정치학연구소 박사
▶ 69년 국립행정학교 졸업
▶ 70~2000년 파리정치학연구소 교수
▶ 르 피가로 등 신문 칼럼니스트로 활약
▶ 현재 파리 불로뉴-빌랑쿠르시 부시장
▶ 최소 국가로 등 스테디셀러 20여 권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