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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네 이웃의 몸을 사랑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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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논설위원

젊은 여성이 무대로 나왔어. 속옷만 입은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스크린 앞에서 춤추기 시작했지. 스크린엔 돌하르방 사진이 떠 있었고. 이 작품의 제목은 ‘VAGINA DENTATA(이빨 달린 질)’. 초등학교 교사, 그녀가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 “여성의 몸을 관음의 대상으로 삼는 남성들 시선에 순응하거나 거부하는 게 아니고요. 내 몸이 섹슈얼하게 읽힐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의지에 따른 것이다, 그런 걸 표현하고 싶었어요.”

 친구. 지난 일요일 오후, 나는 서울시청 신청사 8층 다목적홀에 있었어. ‘몸 SNS를 위한 전무후무’ 공연이었지. 보통사람들이 직접 안무를 한 춤을 선보이는 자리였어. 지난달 국립극장에서 공연했던 78개 팀 중 38개 팀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어. 주어진 시간은 공평하게 2분씩. 참가자들은 어린 시절 가족의 박수 속에 춤을 추던 자신의 동영상 앞에서 몸을 흔드는가 하면(‘I AM YOU’), 고시원 단칸방에 사는 자의 출근 전 세례(洗禮)의식을 연출하기도 했어(‘Shower’).

 “저는 오십에 춤을 만났습니다. 첫 번째 플로잉에서 몸을 둥글게 움직이면서 나의 여성성을 조금씩 회복했고요….” 54세 주부 현남숙씨는 차분한 내레이션과 함께 ‘가브리엘 로스의 5 리듬’을 시연했어. 직장인 최주희씨는 포장용 에어캡을 등에 달고 나와 ‘내 영혼의 뽁뽁이 수트’를, 대학생 남은욱씨는 두 여인 사이를 오가며 계속해서 껴안고 따귀 맞는 ‘상태는 양호합니다.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를 보여줬어.

 저런 것도 춤이 되나 하는 생각도 잠시, 시간이 갈수록 가슴속에서 뭔가 뭉클함이 올라왔어. 그리고 궁금해졌지. 무엇이 저들을 춤추게 한 걸까. 참가자 몇 명에게 전화를 걸었어.

 “춤 테라피를 하면서 정신적 고통을 치유 받고 행복해지고 몸과 생각에 힘이 생기는 경험을 했어요. 내가 나에게 물을 주는 것처럼 조금씩 싱싱해지는 느낌, 그걸 전하려 했어요.”(현남숙씨)

 “살다 보면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완충을 해줄 보호막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최주희씨)

 “사랑에 국한된 게 아니라 정말 다양한 감정에 왜곡이 일어날 수 있구나. 호감을 나타내야 하는데 오히려 내치게 되고….”(남은욱씨)

 다들 나름의 몸짓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타전하고 있었던 거야. 그건 거창하게, 사회를 어떻게 바꾸자는 주장이 아니었어. 단지 내 느낌, 내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과 교감하고 싶다는 거였지. 공연을 기획한 무용가 안은미(51)씨는 “춤은 특별한 교육 없이도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라고 했던 피나 바우슈(Pina Bausch, 1940~2009)의 정신을 이은 무대”라고 했어.

 “사람들은 이미 몸 안에 수많은 언어를 가지고 있어요. 우리 문화가 잘하느냐, 못하느냐 결과에 주눅 들게 하니까 아무것도 못하는 겁니다. 내 역할요? 눈치 보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마음대로 몸을 놀리라고 했어요. 춤을 추면 모든 게 축제가 돼요. 실수마저도.”

 처음에 오디션 신청한 사람만 169명이었대. 그만큼 팔과 다리를 뻗어 세상에 말을 걸고 싶은 이들이 늘고 있다는 거지. 직장인, 주부, 자영업자, 프리랜서, 대학생…. 평범한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모스 부호이고 팸플릿이고 미디어인 거야. 그 몸들이 이제 객석에서 일어나 말하려고 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친구. 그래서 난 몇 가지 물음들을 떠올렸어. 저마다의 골방에 갇힌 느낌들이 무대에 서게 된다면, 그런 장(場)이 늘어난다면 우리 사회도 달라지지 않을까. 타인의 몸과 삶에 대한 존중감도 커지지 않을까. 그 교사의 말처럼 ‘생활에 쓰는 몸뚱아리를 색안경 쓰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줄지 않을까. 더 이상 몸이 비하되거나 무시당하지 않는 나라, 그것이 문화융성, 국민행복 아닐까.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