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밑의 봉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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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프란츠·할스」를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 「렘브란트」를 보면 그림그리기를 집어치우고 싶어진다.』 이렇게 화가 「리버맨」이 말한적이 있다.
지금부터 꼭 70년전 오늘 태어난 홍난파는 음악계에 있어서의 「렘브란트」만한 거대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는 이·삼류의 「바이얼리니스트」이자 작곡가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노래를 잃고 음악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노래를 만들어주고 음악의 맛을 알려주었다. 이런 선구자적인 계몽의 공헌만으로도 그는 우리에게는 가강 소중한 인물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919년 이왕직양악대가 해산의 위기에 몰리자 곧 이를 경성양악대로 개편 시켰다.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후에는 「난파트리오」를 조직했고,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책임자가 된 다음에는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처음으로 만들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나라 양악의 새역사를 꾸며낸 제일인자였다. 그뿐아니라 그는 「옛동산에 올라」,「금강에 살으리랐다」등, 노래를 못갖고있던 우리네 어린이들에게 동요백곡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노래들은 어린이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봉선화」는 슬픈 계절의 민족의 노래로 누구나가 애창하는 노래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를 헐뜯는 사람은 그가 삼천윤이라고 창씨개명하고 「정의의 개가」라는, 이른바 보국의 노래를 작곡하였던 때를 얘기하기도한다. 그러나 한사람의 음악가가 일제의 엄청난 압력을 어느만큼이나 거역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의 이른바 변절에는 동정의 여지가있다. 『조선에 태어난까닭에 제법 음악가의 대접을 받는줄은 모르고 자기가 좀더 음악국인 딴나라에 태어나지 못한것을 탄하는이가 있다. 조선을 음악국으로 만들수없다는 단언은 대체 누가했는지 알고싶다.』 어디엔가 남긴 난파의 이런 귀절이 새삼 깊은 감명을 주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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