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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나가시마 시게오와 한국의 최동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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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서승욱
도쿄 특파원

96번 유니폼을 입고 헌법 96조 개정을 어필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정치쇼만 빼면 꽤 감동적이었다. 어린이날인 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 구장 도쿄 돔에서 펼쳐진 국민영예상 수여식 얘기다.

 국민영예상은 문화·체육 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국민적 영웅들에게 일본 총리가 주는 상이다. 이번엔 일본이 사랑하는 국민 타자 두 사람이 주인공이었다. 미·일 양국에서 홈런 타자로 명성을 날린 마쓰이 히데키(39·松井秀喜), 마쓰이의 스승으로 자이언츠의 9년 연속(1965~73년) 우승을 이끈 ‘미스터 야구’ 나가시마 시게오(77·長嶋茂雄)다.

 시즌 최다 관중인 4만6707명이 몰렸고, 요미우리 계열의 지상파 TV로 생중계됐다.

 공식 은퇴식을 함께 치른 마쓰이가 스포트라이트를 더 받았지만,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아낸 나가시마의 휴먼 스토리 쪽이 감동은 더 했다.

 타율 3할5리, 444홈런, 1522타점이란 통산 기록보다 나가시마는 더 드라마틱한 야구인생을 살았다. 1959년 일왕이 직접 관전한 한신전에서 쏘아올린 끝내기 홈런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멋진 장면”이란 그의 말 그대로다. 투수가 고의 사구(四球)로 내보내려 하자 야구배트 없이 타석에 들어선 불 같은 성격 역시 일본 팬들에겐 경이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여든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예전과는 달랐다. 9년 전의 뇌경색 후유증으로 절뚝거렸고, 마비된 오른손은 호주머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국민들은 엄청난 의지로 다시 일어선 나가시마에게 갈채를 보냈다. 뇌경색 직후 “지팡이 없이 걷기 힘들다”는 판정을 받았지만 그의 손에 지팡이는 없었다. “재활은 배신하지 않는다”며 남들보다 더 땀을 흘렸고, 결국 도쿄돔에 금의환향했다.

 이날 왼손으로만 배트를 쥔 나가시마는 애제자 마쓰이가 던진 높은 시구에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병원 직원의 토스볼을 한 손으로 치는 연습을 거듭해 온 그로선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하지만 야구팬들은 나가시마의 이런 모습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지난해 말 마쓰이의 은퇴 발표 직후 아베 총리는 국민영예상 시상을 검토하라고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마쓰이의 스승인 나가시마에게도 상을 줘야 한다”는 팬들의 주장이 총리 관저에 쇄도했다. 특히 “나가시마가 살아있을 때 상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아베를 움직였다.

 일본의 축제를 지켜보자니 2011년 53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난 고(故) 최동원 선수가 떠올랐다. “언제나 진검 승부”라는 나가시마의 승부관은 “내 공 한번 쳐봐라”며 탱크처럼 승부를 걸던 최동원과 닮았다. 그러나 암과 외롭게 싸우던 최동원은 아무런 갈채 없이 떠났다. 뒤늦게 영구결번식이 치러졌고, 부랴부랴 동상 건립이 추진 중이다. 아직 살아있는 우리의 다른 레전드들은 최동원의 외로운 길이 아닌, 나가시마가 밟은 갈채의 길을 밟았으면 좋겠다.

서승욱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