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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부끄러운 가족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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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제목에 ‘가족’이 붙어 있는데, 영화관엔 혼자 온 관객이 많다. 그럴 법도 하다. 이 영화에서 가족끼리 사이 좋게 주고받는 건 욕설과 발길질이 대부분이니까. 할머니와 엄마, 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아들이 함께 온 가족관객은 영화가 끝나자 황망하게 극장을 떠난다. ‘이거 원 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이거 누가 보자 그랬어?’ 하는 표정들이다.

 천명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고령화가족’(감독 송해성)은 ‘가족이 함께 보기 불편하다’는 의미에서 ‘신선한’ 가족영화다. 마흔네 살의 큰아들 한모(윤제문)는 칠순 가까운 엄마 집에 얹혀사는 중년 백수다. 집안의 희망이던 영화감독 둘째 인모(박해일)는 흥행에 참패하고 인생을 스스로 마감하려던 찰나, “닭죽 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아예 짐을 싸 집으로 들어온다. 두 번 결혼한 막내 미연(공효진)까지 중학생 딸을 데리고 집으로 들이닥치면서 ‘평균나이 47세’ 가족의 느닷없는 동거가 시작된다.

영화 ‘고령화가족’. [사진 CJ엔터테인먼트]

 밖에서도 줄줄 새는 바가지들이니, 안에서는 더할밖에. 형제들은 얼굴만 마주치면 싸움질이고, 무직자 삼촌은 중학생 조카의 용돈을 갈취한다. 부담스러운 설정과 다소 비호감이던 원작의 캐릭터를 정감 나게 바꿔놓은 건 배우들의 힘이다. 특히 세상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아들딸을 무한 애정으로 받아주며, 끼니마다 고기를 구워 먹이는 엄마를 연기한 윤여정의 섬세한 표정은 마음을 두드린다. 엉망진창인 이 가족을 지탱하게 하는 건 결국 ‘엄마’와 ‘엄마가 해 주는 밥’이다. 천명관 작가는 아예 책 서두에 이렇게 적었다. ‘언제나 텅 비어 있는 컴컴한 부엌에서 우리의 모든 끼니를 마련해 준 엄마에게.’

 ‘힘들 땐 가족이 최고’라는 뻔한 메시지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게 이 영화의 매력이다. 형을 대신해 깡패에게 끌려간 인모는 두들겨 맞다 별안간 ‘인간의 존엄’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니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린 위대한 문명을 창조했고, 우리 스스로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살도록 제도를 발전시켜온 존재야. 무슨 짓을 하며 살아도 좋지만 절대로 그 사실을 잊어선 안 돼.” 아름답든 추하든 위대하든 찌질하든, 모두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 이런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너무 가까워 때로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내 가족의 인생에서도 존중받아야 할 한 인간의 분투를 읽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 인생을 ‘사랑’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의리’는 지키며 살아가는 게 ‘가족’이란 이름으로 뭉친 이들의 의무라고 말이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