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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구직 1500전 1500패 … 60세 은퇴자, 백화점 주차원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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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꼼꼼하고 성실한 일처리, 푸근한 인상으로 60세 이상 시니어 인력이 주목받고 있다. 백화점 업계 첫 ‘시니어 주차요원’으로 선발된 김만수씨가 14일 서울 현대백화점 목동점 진입로에서 차량을 안내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14일 오전 11시 서울 현대백화점 목동점 주차장 입구. 사파리탐험대 같은 베이지색 제복을 모자까지 깔끔하게 갖춰 입은 60대 노신사 두 사람이 절도 있게 팔을 움직인다. 한 노신사가 오렌지색 봉을 들어 진입 차량을 잠시 막는 동안 다른 노신사가 보행자를 보낸다. ‘제복 노신사’의 정체는 올 1월 85대1의 경쟁률을 뚫고 뽑힌 이 백화점 ‘시니어 주차요원’이다. 백화점의 처음과 마지막 ‘얼굴’인 주차장 입구와 출구 안내를 담당하고 있다. 이미지를 중시하는 백화점 업계가 60대 직원을 서비스 전면에 내세운 것은 처음이다. 60세 이상 인구 비중이 10%를 훌쩍 넘고 경제활동 참가율도 40%에 육박하면서 이들 ‘시니어 워커(senior worker)’의 활동 무대도 점점 넓어지고 있다.

시니어 주차요원의 경쟁력은 성실함과 친근한 이미지다. 스마트폰에 빠진 보행자, 내비게이션을 조작하며 운행하는 운전자를 걱정하며 잠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결근은 상상도 못한다. 백화점 주차장 출입구 앞을 수시로 오가는 인근 아파트 주민들은 “어르신들이 하니까 길을 막는 게 아니라 돌봐주시는 것 같다”고 좋아했다.

 이 백화점 배성 차장은 “젊은 주차요원은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잦고, 근무 중에 휴대전화 통화 등 딴청을 피우거나 고객에게 거칠게 대응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백화점 측은 고심 끝에 노인 일자리 창출이라는 사회 공헌 효과까지 있는 시니어 인력에 눈길을 돌렸다. 시험 삼아 지역 구청에 공고를 냈는데 수백 명이 몰렸다.

 ‘60세 이상 푸근한 인상’을 기준으로 6명을 선발한 뒤에도 백화점 내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배 차장은 “백화점의 젊고 활기찬 이미지와 맞을까, 어르신이 서비스 마인드를 가지고 고객을 상대할 수 있을까, 체력 문제는 없을까 등 고민이 많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근무 초기에는 “어르신을 왜 고생시키느냐”고 고객들이 백화점에 항의하기도 했다. 4개월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주차요원 김만수(64)씨는 “요즘은 어르신이 정중하게 대해주니 고맙다고 VIP 고객이 음료수를 건네기도 한다”며 활짝 웃었다. 배 차장은 “고객들이 할아버지·아버지처럼 친근하게 느끼고, 어르신을 친절하게 대하니까 좀 불만이 있어도 참는 등 기대하지 못한 효과가 많다”며 “안정적인 서비스를 위해 시니어 주차요원을 더 뽑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시니어 주차요원의 이력은 제각각이다. ‘횟집 사장’ 출신 김만수씨, 인쇄업을 했던 송광욱(62)씨, 그리고 실명을 밝히기가 곤란하다고 밝힌 서울지하철공사 출신의 ‘공무원 김선생’(63), 글로벌기업에서 30여 년 근무한 ‘엔지니어 이선생’(60) 등 4명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각기 다른 이력이지만 ‘은퇴 후 일자리 찾기’의 고충담으로 이야기꽃이 핀다.

 ▶엔지니어 이선생=2011년 은퇴 뒤 1년 반 동안 기술직을 구하려고 이력서를 냈는데 1500전 1500패 했어요. (쓴웃음을 지으며)그래도 e메일 접수라 종이값은 안 들었지. 내 기술을 원하는 데는 많았지만 50살 넘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60세 이상이라고 가산점 주는 데는 이곳밖에 없었어요.

 ▶송광욱=65세 넘어가면 쳐다도 안 봐요. 60만 넘어도 아파트 경비원, 청소원밖에 할 일이 없는데 밤샘도 해야 하고 월급도 여기보다 20만원은 적어요. 처음엔 불평하는 고객에게 화내지 않고 미소 짓는 게 힘들었지만 요령이 생겼어요. 성질이 나면 막 웃기는 일을 생각해요. 웃는 얼굴에는 침 못 뱉더라고요.

 ▶김만수=여기서 서비스 교육 받으면서 진짜 많이 배웠어요. ‘아, 내가 이렇게 손님한테 굽힐 줄 알고 장사했으면 2년 전에 횟집이 안 망했을 텐데….’ 내 가게니까 자존심만 내세우고 마음에 안 드는 손님은 오지 말라고 했었거든요. 절하는 법부터 다르더라고요. 대기업에 와서 사회 공부한다고 생각하면 힘이 나요.

 ▶공무원 김선생=눈높이를 낮추면 직장을 구할 수 있어요. 저도 전 직장에서 관리직으로 30년 근무했지만 제2의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일자리센터 찾아다녔어요. 과거는 경력일 뿐이에요.

 ▶이선생=그래도 은퇴 후 일자리가 더 다양했으면 좋겠어요. 엔지니어 키운 비용이 아깝잖아요. 영어·중국어·일본어 등 4개 국어를 하는데 얼마 전 중국인 고객에게 “차가 멈췄으니 빨리 지나가시라”고 말씀드린 게 전부예요.

 ▶송광욱=제 딸뻘인 고객이 차를 막는다고 짜증을 낼 때도 있어요. 솔직히 그만둘까 싶기도 했어요. 하지만 우리 나이에 이렇게 좋은 직장 찾기가 정말 어렵거든요.

 60세 이상 인구가 증가하면서 시니어 사업도 성장하고 있다. 시니어 사업은 다시 시니어 일자리로 연결된다.

유한킴벌리는 신체적·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펼치면서 시니어 인력 22명을 고용했다. 요실금 팬티 등 시니어 생활용품을 판촉하고 문의 사항을 상담하는 인력들이다. 자식 세대들에게는 말하기 부끄러운 요실금 문제 등을 동병상련으로 느끼는 또래 상담사에게는 쉽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손승우 홍보팀장은 “시니어 사업과 관련된 신규 일자리는 시니어에게 제공한다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다.

 롯데마트는 체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꼼꼼한 ‘시니어 사원’ 300여 명을 고용해 맞춤 업무를 하도록 했다. 인터넷쇼핑몰을 통해 고객이 주문한 상품을 매장에서 고객 대신 꼼꼼히 골라 장바구니에 담는 ‘온라인피커(online picker)’ 업무가 대표적이다. 롯데마트는 “장보기 경험이 많고 상품을 꼼꼼하게 고르기 때문에 젊은 사원보다 업무 능력이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진열대에 모자란 물건이 없는지 찾아내는 결품 체크, 고객센터·문화센터 도우미, 외국인 통역 등도 시니어 사원 업무다. 체력을 안배해 하루 6시간 이내로 근무하지만 시간당 임금은 다른 직원과 같다.

 한국맥도날드도 ‘시니어크루’ 130여 명을 운용하고 있다. 맥도날드 매장에 식재료가 배송되면 날짜별·종류별로 확인하고 매장 시설을 유지·관리하는 등 역시 꼼꼼함이 요구되는 업무다.

글=구희령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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