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vaccine)은 암소의 선물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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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잠든 아들 머리맡에 ‘그리스인 조르바’가 놓여있었다. 작년 중년 남성들 사이에 ‘조르바 열풍’이 불었다더니 여파가 아들에게까지 미친건가 보다. 책을 펼쳐보니 이야기의 처음 주인공이 ‘크레타’섬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크레타섬은 그리스에서 가장 크고 인구도 많다. 그리스의 역사와 신화에서도 아주 중요한 섬이다. 도처에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 에게 해와 크레타 섬

크레타섬은 어린 제우스가 아버지의 눈을 피해 숨어 살던 곳이다. 성년이 되어서는 페니키아 공주 에우로페(에우로페(Europe)를 납치해 숨겨둔 곳이기도 하다. 에우로페는 미노스(Minos)를 낟았고, 미노스는 크레타 왕국의 지배자가 됐다. 에우로페(Europe)의 이름이 유럽(Europe)이 됐다. 유로(Euro)는 그리스 신 제우스에게 납치된 동방의 공주 이름에서 왔다. 공교롭게도 유로화 위기의 진앙지가 바로 그리스다. 에우로페 공주의 한이 남은 걸까?

미노스왕의 크레타는 강성해져 주변 에게 해의 해상 지배권을 장악했다. 미노스가 보기엔 자신이 온 세상의 지배자가 됐으므로 세상에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신은 인간을 질투하기 시작했다.

미노스는 자신과 왕국의 안녕이 아버지인 제우스, 그리고 크레타에 풍요로운 햇볕을 선사해주는 헬리오스(Hellios) 신의 보살핌으로 알고 두 신을 잘 섬겼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는 자신을 잘 받들어 모시는 미노스가 너무 고마워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했다. 이 불쌍한 여인이 바로 파시파에(Pasipaë)다.

강력한 군주의 아내가 된 것이 불쌍하다고? 자, 이제 그 사연을 들어 보자.

미노스의 권력 기반은 섬이다. 섬은 바다에 속하고, 바다의 신은 포세이돈(Poseidon)이다. 그런데 미노스는 포세이돈을 무시했다. 질풍노도(疾風怒濤)로 상징되는 거친 신 포세이돈이 자신의 영지 한 가운데서 자신을 업신여기는 오만한 인간을 보고 어떤 기분이었을까? 포세이돈은 비록 제우스의 형이고, 제우스와 합세하여 아버지 크로노스(Cronus)를 제거했지만, 제우스 가문과는 유난히 사이가 나빴다.

제우스와는 훗날 아킬레우스(Achilleus)의 어미가 된 님프 테티스(Thetis)를 두고 다퉜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Hera)에게는 도시국가 아르고스(Argos)를 빼았겼다. 제우스의 딸 아테나(Athene)에게는 도시국가 아테네(Athens)를 넘겨줬다.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에게는 신탁으로 유명한 델포이(Delphi)를 빼앗겼다.

그런 포세이돈이 제우스의 아들에게 또 무시당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바다 괴물을 보내 미노스를 덮쳐버릴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답지 않게 신중하게 계략을 쓰기로 한다.

포세이돈은 해안에 이는 물거품을 이용해 눈이 부시도록 ‘흰 소’ 한 마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미노스에게, 흰 소를 줄 테니 그 소를 제물로 바쳐 제사를 지내달라고 부탁했다. 쉽게 말하면 ‘엎드려 절 받기’인 셈이다. 미노스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손해 볼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곧 문제가 생겼다. 흰 소를 본 미노스가 ‘소에게 그만 홀딱 반해버린’ 것이다.

사람이 소에게 홀딱 반한다고해서 놀랄 것도 없다. 미노스에게는 가능한 일이다. 일찍부터 바람둥이였던 왕은, 애정의 대상이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남성에게 까지 미쳐 미소년 밀레토스와의 애정 문제로 동생 라다만티스(Rhadamanthys)와 다툴 정도였다.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그런 무차별적인 탐욕을 슬쩍 건드린 것이다.

미노스는 흰 소가 너무 마음에 들어 포세이돈과의 약속을 어기고 다른 소를 잡아 대충 제사를 지내준다. 포세이돈은 알고도 모른 척했을 테다. 그리고 흰 소는 아주 잘 고이 모셔두었다. 하지만 흰 소를 좋아한 인물이 또 한 사람 더 있었다. 바로 왕비 파시파에였다.

헬리오스의 정략 결혼 정책으로 희대의 카사노바인 미노스에게 넘겨진 파시파에가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어느 날 그녀가 남편의 애우(愛牛)를 본 순간 순식간에 소에게 빠져 버린 것은 아프로디테의 마력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포세이돈과 아프로디테, 심술 궂은 신들은 인간을 이렇게 능욕했다.
파시파에는 소에 대한 열정으로 당시 크레타에 와있던 발명가이자 기술자인 다에달로스(Daedalus)를 불러 해결책을 만들도록 했다. 최고의 기술을 가졌지만 자신의 기술로 초래될 불행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할 겨를이 없던 인간 다에달로스는 마침내 소에 대한 왕비의 사랑을 육체적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장치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왕비는 '소 자식'을 낳고 말았다.

왕비가 출산한 소의 자식은 머리는 소, 하체는 사람인 다시 말하면 ‘소 머리 인간’이었다. 그 정도만 해도 참아줄 수 있겠지만 이 괴물은 특이하게도 식인(食人) 즉, 사람을 잡아먹는 습성이 있었다. 괴물은 크레타 섬을 헤집고 다니며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사람들은 공포에 덜면서 괴물을 미노스의 황소 즉, 미노타우루스(Minotaurus) 라고 불렀다.

▲ 파시파에와 미노타우루스

taurus는 라틴어로 숫소를 말한다.암소는 vacca 이다. taurine 은 황소의 담즙으로부터 발견된 성분으로 인체에도 존재한다. 피로 회복제에 많이 사용되는지 심심치 않게 광고에도 등장한다.

천연두를 퇴치했던 에드워드 제너는 소의 전염병 우두(牛痘)를 이용해 사람의 마마(天然痘; 두창)를 예방하는 기술을 발견했다. 이를 기념해 암소를 뜻하는 라틴어 vacca에서 vaccine 이란 이름을 지었다. 만약 황소를 이용해 예방접종 기술을 발견했다면 진작에 ‘타우린’이라고 불렀을 지도 모른다.

이어지는 2편에서 반인반수 미노타우루스를 가둬버린 라비린스 (Labyrinth) 이야기가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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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욱 원장 기자 indigo@live.co.kr <저작권자 ⓒ 중앙일보헬스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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