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다시 읽는 마루야마 마사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

오랜만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교수의 『일본정치사상사 연구』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을 다시 꺼내 보았다. 1996년 세상을 떠난 마루야마 교수는 20세기 일본의 가장 뛰어난 정치학자로 국경을 넘어 많은 정치학도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 외래문화 수용과 전통문화 보존을 동시에 이룩하며 근대화의 성공 사례라고 할 수 있던 일본이 초국가주의와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서 패전국의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경위와 원인에 대한 결정적 해답을 바로 마루야마 교수의 저서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복잡한 내외정세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도 역시 그의 역사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당장 한반도를 둘러싼 대결 구도는 위험 수위에 다다르고 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른 경위를 제대로 이해하고 한반도 통일과 동아시아 평화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선 동북아 삼국, 즉 한국·중국·일본이 걸어온 지난 150년 역사에 대한 공동의 인식을 조성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라 하겠다. 근래의 삼국관계에서 협조보다는 갈등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것은 바로 삼국 간 역사인식의 괴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우리 지역의 공동 번영을 위해선 이 문제에 대해 각기 심각한 성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서구에서 비롯된 제국주의와 이데올로기 시대가 아시아로 밀려오는 과정에서 한·중·일 삼국이 겪은 결코 순탄치 않았던 경험은 이제 정치적 시비보다는 상호 이해를 위한 객관적 역사인식의 대상이 돼야 한다. 19세기부터 1945년 패전에 이르는 일본 역사의 성격을 냉철하게 해부한 마루야마 교수의 업적은 그러한 작업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유교문화권의 중심인 동북아에서, 특히 주자학적 전통이 작용했던 도쿠가와 일본이 메이지 시대로의 전환 과정에서 개인이나 가족의 도덕윤리와 국가 통치의 규범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했느냐에 대한 마루야마 교수의 연구는 근대일본의 국가 성격을 이해하는 지름길을 열어주었다. 개항을 압박하는 서구세력의 위협에 직면하여 국가의 독립과 국민의 통합을 이루고 부국강병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봉건사회의 다원적 분열을 하나로 묶는 천황제를 택함으로써 국가체제의 정신적 권위와 정치권력을 일원화하는 데 메이지일본은 일단 성공하였다. 그 결과 민권이 국권에 매몰되는 신민정치 문화가 제도화돼 일본식 내셔널리즘은 전체주의적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민주권을 포기한 일본 내셔널리즘은 모든 일본인의 천황에 대한 충성은 제국신민의 당연한 의무로 내면화하도록 교육하는 한편 밖으로는 성공적 일본제국의 팽창을 통해 국민의 궁핍과 불만을 심리적으로 보상하는 동력이 되었다. 천황이 상징하는 정의를 아시아와 세계로 전파하기 위한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하며, 정의는 항상 승리한다는 윤리와 권력의 상호 보완 논리가 일본 내셔널리즘의 군국주의적 침략을 뒷받침하였다. 아시아 민족의 해방을 목표로 한다는 이른바 ‘대아시아주의’도 단지 그러한 일본 패권주의의 슬로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함으로써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의 섬나라로 수축되었고 제국적인 심벌에 집중됐던 국가의식도 중심을 잃고 급격히 퇴조하였다. 무력적 우월성으로 지탱되었던 황국(皇國) 관념이 미국의 점령 아래에서는 정신적 진공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진단한 마루야마 교수는 ‘평화문화국가’란 새 국가상(像)이 과연 국민의식을 견인할 수 있을지 매우 회의적이었다. 또한 일본 내셔널리즘이 어떤 형태로든 부활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식민제국주의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기초 위에 서야 하며 여타 아시아 내셔널리즘의 흐름에 등을 지는 일은 반드시 피해 가야 한다는 것을 이미 60년 전에 설파했었다.

 어느 나라든 외국의 비판이나 충고에 따라 역사의식이나 국가 진로가 바뀌는 경우는 없다. 오직 국민 스스로의 고민, 토론, 성찰을 통해서만이 미래로 나아갈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유난히 길고 사연이 많은 역사를 지닌 한·중·일 삼국의 경우는 특히 더 그럴 수밖에 없다. 한국은 물론 이웃 중국과 일본에서도 심각한 자성의 노력이 있을 것을 바라 마지 않는다. 모두가 대단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대국들이 아닌가. 60년 전 패전 후의 혼란과 침체 속에서 전개된 마루야마 마사오 교수의 냉정한, 그러나 진보적인 역사인식과 정치분석이 오늘날 얼마나 유효한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에서만이라도 그의 지성이 넘쳐흐르는 저서들이 많이 읽히기를 바라게 된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