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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울지말자 적이 좋아할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이제는 울지 않으렵니다. 더이상 우리가족이 슬퍼한다면, 적이 즐거워하겠기 때문입니다.』 지난가을 노고산전투에서 북괴공비를 소탕하다 흉탄에 쓰러진 고이익수준장의 미망인 이순관(45)여사는 입술을깨물어 슬픔을 참으며 조용히 말했다.
합동장례식이 끝난지 5일째되는 3일 고이준장의 자택(성북구인수동632의17)에는 조촐한궤연이 마련되고 가족들의 정성어린 향불이 조용히 타고있다.
장남 이훈병(경기고2년)군을 비롯, 2남3녀의 자녀들은 아버지 고이준장이 남긴 일기책과 사진첩을 오늘도 다시 들여다보며 방공전선에서 의롭게 숨진 그 높은 뜻을 되새기고 있다.
『의를 위해 죽는 병사가 되어도 사를 위해 사는 영웅이 되지 않겠다』- 이 말은 고 이준장이 지난24일 아침 노고산 전투를 맞이해 떠나며 미망인 이여사에게 남긴 마지막말.
이장군은 늘 부하들에게『비겁하지 말아라. 사람이 총알을 피하나, 총알이 사람을 대하지』라고 훈시해왔다고도 했다.
이러한 평소의 신념이 맨선두에서 북괴무장공비를 잡으려고 50미터까지 접근하다가 흉탄에 쓰러지게 된 것.
이장군이 중대장 시절이었다. 백마고지 전투가 치열하던 지난51년 어느 봄날. 이장군은 뜻하지않던 야습을 받았다. 소대장과 사병l0여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장군은 맨선두에서 치달으며 소대병력으로 적진을 한꺼번에 휩쓸었다. 이전투에서 괴뢰군1개중대를 산산이 무찌르고 잃었던 부하와 고지를 다시찾기도했다.
이여사는 이준장이 공주농업학교를 다니던 28년전에 결혼했다. 장녀명숙(25)양을 낳은 후 이장군이 학병에 끌려갔다가 탈영해서 중경에 있던 광복군에 들어가서 귀국한 후 몇 년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떨어져 살아야했다.
이여사는 고인이 입었던「카키」색 군복을 말짱히 챙겨놓았다.
그리고 소대장때부터찍어둔사진첩과신문「스크랩」을어루만지며『고인의뜻과 사회의 온정에 보답하기위해 고향인 부여에서 학원을 세울 계획』이라고 쓸쓸히 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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