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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자화상은 물론 여성 초상화까지 시도 문예부흥 주도한 거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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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호 06면

‘강세황 70세 자화상’(1782), 보물 제590호. 야인의 도포를 입고 관료의 사모를 쓴 연극적 도상으로 자신의 일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자화상. 표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올해는 단원 김홍도의 스승이자 정조대 예원의 총수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탄생 3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리는 다채로운 문화행사로 고미술계는 벌써부터 묵향이 그윽하다. 표암의 대표작을 망라한 대규모 전시가 오늘부터 간송미술관(‘표암과 조선남종화파전’·5월 12~26일), 또 국립중앙박물관(‘강세황: 예술로 꽃피운 조선 지식인의 삶’·6월 25일~8월 25일)에서 잇따라 열리고, 한국미술사학회는 학술대회(7월 5일)를 통해 그의 예술세계를 종합적으로 재조명한다.

탄생 300주년 맞은 조선시대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

표암은 조부 양대가 재상에 오르고 왕실과 겹사돈을 맺은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났다. 그러나 큰형과 장인이 역모에 휘말리며 평생 벼슬길이 막히자 동병상련의 스승과 동지들이 모여 있는 안산의 처가 근처로 낙향한 뒤 영조대 후반의 탕평정치로 다시 벼슬길에 나가는 환갑 때까지 30년간 처절한 밑바닥 삶을 살았다. 천품으로 타고난 시서화(詩書畵)의 예술적 감성과 능력으로 자신을 가꾸며 견딘 표암은 바닥에서 경험했던 생생한 삶의 현장과 정서를 창조적인 예술로 승화시켰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운 표암은 누구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금과 내외는 물론 상하까지 폭넓게 넘나들고 진솔하게 소통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융합함으로써 실로 다채롭고 창조적인 예술 세계를 일구어냈다. 시서화 일치의 인문학적 경계를 지향하는 남종문인화를 본격적으로 실천하며 시적 상징성과 서예적 표현성, 회화적 형상성을 한 화면에 종합적으로 구현한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매란국죽을 사군자로 묶는 새로운 형식을 창안한 것도 그가 최초였다. 1750년대라는 18세기 중반에 이미 초점투시법과 수채화풍의 채색 명암법을 시도하며 본격적인 서양화법을 구사한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또한 수백 점의 진경산수화를 사생한 것은 물론 복날 세시풍속을 담은 가장 토속적인 풍속화까지 시도하고, 심지어 그동안 기피해 왔던 자화상과 여성 초상화까지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표암은 겸재 정선에 의해 꽃피기 시작한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를 종합적으로 포괄하는 창의적인 ‘진경’ 개념을 정립하고, 미천한 신분의 단원과 그의 세속적인 풍속화를 “파천황의 신필 걸작”이라고 극찬하는 평론까지 써주며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 문예군주였던 정조는 문신과 원로를 대상으로 한 특별 과거시험에서 연달아 장원하며 실력을 입증한 표암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며 10년 만에 재상으로 발탁하고 자신의 어진 제작까지 감독하게 해 날개까지 달아주었다.

그리하여 표암은 정조대 예원의 총수로 활약하며 겸재 시대와 단원시대를 연결시켜 줌으로써 진경풍속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고, 나아가 북학을 토대로 한 남종문인화와 사군자가 크게 발흥하는 추사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릴 수 있는 가교 역할도 했다.

21세기 새로운 문화 코드로 떠오른 ‘비움과 소통’‘통섭과 융합’의 정신을 이미 선구적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표암과 그의 예술을 새롭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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