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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공은 비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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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기선민
중앙SUNDAY 기자

몇 년 전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과도한 높임말이 사회적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이 바지는 고객님께 크십니다”라든가 “음료 2잔 나오셨습니다” “이 상자엔 빵이 12개 들어가십니다” 같은 소위 ‘사물 존칭’이다. ‘고객님’을 높이려다 바지와 음료, 빵이 덩달아 신분 상승을 하는 격이다. “4000원이십니다”라고 말하는 편의점 점원에게 “4000원 여기 계십니다”라고 대꾸할 뻔했다는 누군가의 얘기는 그저 웃어 넘기기엔 좀 그렇다. 국립국어원에서 질색할 이런 과도한 존대어법은 아직도 우리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흥미로운 건 그런 과도한 높임말을 쓰는 당사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화법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잘 알고 있다는 거다.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란 옛말이 딱 맞는 경우다.

 그런데 그들은 왜 “손발이 오그라든다”면서도 고객을 응대할 때 마치 자동인형처럼 ‘사물 존칭’을 쓰는 걸까. 주범은 고객 우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기업과 사회 분위기다. 뭐든 문제가 생겨 시끄러워지면 골치 아프니 아무리 고객이 ‘진상’ 짓을 해도 일단 서비스업 종사자는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는 거다. 존댓말 인플레도 그런 기조의 부산물이다. 다음은 한 인터넷 댓글에서 읽은 어느 백화점 직원 얘기다. “아침마다 개점 전에 ‘올바른 어법으로 응대하자’는 안내방송이 나와요. ‘이십니다’ 하지 말고 ‘입니다’ 하라고. 하지만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죠. 저렇게 안 하고 올바른 존대법을 썼는데 ‘점원이 무례하다’는 항의를 받은 황당한 경우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높이는 거죠.” 내가 마시는 커피가 ‘나오시는 데’ 길들여진 사람에겐 어느새 돈을 냈으니 웬만한 요구는 해도 되겠다는 사고의 비약이 생긴다.

 최근 항공기 비즈니스석에 탑승한 한 대기업 임원의 ‘라면 소동’을 보면서 높임말 논쟁이 떠올랐다. 임원이 될 정도로 유능한 샐러리맨이었던 그는 어쩌다 진상 고객으로 전락했을까. 서비스직 종사자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고 여긴 개인적 품성이 1차 요인이겠지만 그게 라면 소동의 전모를 설명해주진 못한다. ‘사물 존칭’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과열된 고객 우선, 친절 제일 분위기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승무원에게 라면을 여섯 번이나 다시 끓여오라고 한 사람도 문제지만 기내 서비스의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요구에 계속 응하도록 한 항공사의 고객 응대 매뉴얼도 문제다.

 어쩌면 라면 소동을 계기로 우리는 서비스업의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서비스업은 돈을 지불하고 상대가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지, 서비스 제공자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 상대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노역이 아니다. ‘사물 존칭’이 생성되는 환경부터 당장 바꿔나갈 일이다. 쓰는 사람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지나친 높임은 예의가 아닌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라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예의 없음을 입증할 뿐이다.

기 선 민 중앙SUNDAY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