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포대화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배불뚝이 행각승(行脚僧)이 노송 아래서 한잠 늘어지게 잤다. 봄볕은 따사롭게 간질거리고, 스님은 시원하게 기지개 켜고 크게 하품한다.

이 ‘자유로운 영혼’은 중국 명주 태생의 선승(禪僧) 포대화상(布袋和尙)이다. 이름은 계차(契此), 잡동사니를 쑤셔 넣은 포대를 메고 거리를 배회해 ‘포대화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스님이 활약한 시기는 당나라 말에서 오대(五代) 초. 거리엔 전란으로 부모를 잃고 걸식하는 고아, 굶주린 이들이 많았다. 화상은 종일 탁발하고 그것을 어려운 이들에게 나눠줬다. 그에게 물건을 얻은 가난한 이들은 그때부터 재복이 일어 가난을 면하고, 음식을 얻어먹은 이들은 먹을 복이 생겨 주리는 일이 없어졌으며, 병자들은 병이 나았더라는 속설도 있다.

김득신, 포대흠신(布袋欠伸) 지본담채, 22.8×27.2㎝. [간송미술관 소장].

스님에겐 길흉화복이나 날씨를 점치는 능력도 있었다. 본인의 죽음을 예감하고는 이런 게송(偈頌)을 남기고 앉아서 입적했다. ‘미륵 가운데 참 미륵께서 백천억으로 몸을 나누시네(彌勒眞彌勒 分身百千億) 때때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지만 그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네(時時示時人 時人自不識)’.

 덕분에 사후 미륵불의 화신으로 숭상됐고, 그의 초상을 그리는 게 유행했다. 이 같은 중국의 도가화(신선도)·선화(禪畵)는 고려 때 전래됐고 조선 정조 시대에 융성했다. 사회가 안정되면서 장수·부·강녕 등 기복에 대한 의지가 강해진 까닭이다.

그림 ‘포대화상이 기지개를 켜다(布袋欠伸)’는 이 시대 풍속화의 대가 긍재(兢齋) 김득신(1754∼1822)의 골계미 넘치는 작품이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있다. “가야 할 곳도 가야 할 시간도 정해진 것이 아니니 느긋할 수밖에. 호방한 필묵법으로 한 번에 휘둘러 낸 통쾌한 그림이다. 소재와 솜씨가 혼연일치된 선화의 백미”라는 게 이 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연구실장의 평가다.

 산타클로스처럼 넉넉한 몸집을 하고 큰 자루에서 뭐든 꺼내 준다는 포대화상은 근세 중국에서 재신(財神)으로 모셔졌다. 중국에 가면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부자 되세요’가 꽤나 좋은 덕담처럼 된 우리네 세태와 비슷하달까. 소주회사 ‘금복주’의 마스코트 ‘복영감’으로 나타나는 등 그는 우리 땅에서도 퍽 사랑받는 아이콘이다. 그러나 포대화상이 빛난 것은 재물을 쌓아두지 않고 어려운 이들과 나눠야 복되다는 메시지 때문일 터다.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온다. 올해의 부처님은 금요일에 오시는 덕에 연휴가 됐다. 넉넉함과 여유를 만들어 주신 부처님의 자비가 더욱 감사한 5월이다.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