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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시대 구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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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역사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할 때 시대구분 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역사의 서술은 편의적인 구분의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국사학계의 자기 비판이다. 비교적 소홀했던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루어 보기 위해 경제사학회(회장 조기준)는 8, 9 양일 간 「유네스코」회관에서 학술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10편의 논문이 발표됐고 40여명의 학자가 토론에 참가했는데 발표 논문을 중심으로 한국사의 시대 구분이 학계에서 어떻게 문제되고 있는지 간단히 살펴본다.
세계사적인 시대구분에서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 되고 있는 것은 노예제사회를 「고대」로, 농노제적 생산관계의 봉건사회를 「중세」라고 보는 것이다. 이 시대 구분법을 한국여사에 적용시키면 고조선은 초기 형태의 고대 사회로서 성숙기에 들어가지 못한 채 망해버리고 삼국시대로 되는데 이것은 노예사회를 거쳐 봉건사회로 발전한 것도, 원시사회에서 직접 본견사회로 발전한 것도 아니다. 김철준 교수에 의하면 통일 신라 때의 귀족들은 노예와 예민을 가지고 있었고, 엄격한 신분제도로서 골품제가 있었는데 이 귀족의 경제 기반은 봉건사회의 경제기반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고대는 노예사회>
즉 신라 중기까지도 공동체적 유대를 그대로 가지고 예민과 노예를 지배하는 부족국가의 지배 기반을 그대로 통합하고 쌓아 올린 것이며, 여기에 어떤 근본적인 질적 변화가 일어난 일은 없었다. 그는 고려의 광종, 성종 이후에 비로소 완전히 봉건 사회 단계로 들어간다고 보고 있다.
김병하 교수는 이와 전혀 다른 시대 구분을 시도했다. 인류사회는 원시사회 노예제 사회 봉건사회 근대사회의, 순서로 반드시 경과하는 것이 아니라 원시 사회에서 노예제 사회를 거치지 않고 봉건사회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고조선 삼한 부여가 모두 직접적 생산자의 대부분이 봉건적예??농민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계급사회가 성립된 시기부터 이조 말까지를 봉건사회로 볼 수 있고, 삼국이 성립되고 집권적 지배체제가 어느 정도 확립된 2∼3세기를 경계로 하여 이전을 고대사회 이후를 중세 사회로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삼국 이후는 중세>
고려 시대를 우리 역사의 발전 단계에서 어떠한 시기로 봐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강보철 교수는 이를 전형적인 중세적 봉건사회로 보는 지배적 견해에 대해 비판적이다. 전시과 체제(귀족 관리들에 한하여 토지의 급부를 규정한 법제) 하의 고려 전기의 농민은 토지 지배가 극히 미숙한 상태에 있었고, 형제 근친이 토지를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저급한 상태에 있었다. 그들의 촌락은 대체로 하나의 혈연 집단으로서 지연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촌락에 사는 농민들은 주로 인신적으로 국가에 예속된 고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전시과 농민의 성격은 중세적이라기보다 고대적이라는 견해이다.
그는 전시과 체제가 무너진 고려 중기이래 이조 성립에 선행하는 고려후기의 약2세기 동안이 서서히 고대 사회를 극복하여 중세 사회를 형성하는 과도기적 전환기라고 한다.
그러면 한국 근대화의 기점은 언제인가?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통한 일본과의 접촉의 시작을 근대화의 기점으로 설정하는 것에 별 이론이 없었다. 이것이 곧 근대화는 아니지만 「근대화의 계기」였다는 것은 전반적으로 지지된 견해였다. 그러나 이 조약이 근대사의 시점이 될 수는 있지만, 근대화의 기점까지 될 수가 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한 학자가 있었다. 근대화는 주체적인 의식이 작용하여 근대적인 것을 지향하여 발전하려는 의욕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선근 박사도 대체로 이와 같은 입장에서 성패는 여하간에 스스로 과감한 개혁을 시도했던 1860년대를 근대화의 기점으로 잡을 것을 제의했다.
그는 동거의 「인내천」「후천개벽」의 혁명사상, 대원군이 단행한 정치개혁을 근대화의 시초로서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일제세력이 침입하기 전에 우리가 서구 세력의 도전을 직접 받고 대 개혁을 기도하고 추진한 것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근대 없이 현대로>
한국 근대사의 성격을 문제삼은 조기준 교수는 우리가 서구적 의미의 근대는 갖지 못한 채 바로 「현대」를 맞이하게 됐다고 한다.
서구의 근대란 사회 및 국가 조직 면에서는 시민사회 및 국가 경제적으로는 산업자본의 확립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근대 시민 국가의 성립이 산업자본의 기반을 조성했고 근대 산업혁명에로의 길을 열어주었다.

<미약한 시민사회>
「아시아」에서의 근대사는 제국주의 침략에서 벗어나려는 운동 속에 전개되었다. 조 교수에 의하면 한국 근대사는 18세기까지 소급하여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영조 정조 시대는 시민계층이 대두했다. 그러나 아직 봉건세력을 부시고 시민국가를 형성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했다. 이것이 19세기 세도정치의 발호로 그 성장이 저지 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봉건적 반동기다.
상공업 계층이 국민적 규모로 확대되기 전에 제국주의 침략이 닥쳐왔다. 개항 이후 시민계급은 비로소 대중 속에 뿌리를 박기 시작했고 1890년대에는 한국 근대사가 국민의 시민의식에서 전개됐다.
갑오경장 을사보호조약 전후의 의병봉기 교육열의 고조, 그리고 3·1운동을 위시한 20년대의 민족 항쟁은 한국민족의 발전적인 근대사상을 보여준다고 그는 주장했다.

<일조 때는 과도기>
끝으로 일조 시대를 어떻게 시대 구분할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김대진 교수는 총독정치 36년 간은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과도기이나 근대적 제도가 강제되었다는 점에서 과도기며, 민주적 의식적인 주체적 준비단계로서의 과도기로 보기 힘들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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