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마드리드의 3·11 종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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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마드리드의 종은 왜 울렸는가. 열흘 전 3월 11일 오전 9시37분,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서는 600여 교회의 종들이 동시에 울리기 시작하였다. 1년 전 그 시간 마드리드역에서 열차 테러로 숨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의 종소리가 쌀쌀한 아침 하늘에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12시 정오, 192명 희생자 수대로 심은 삼나무 숲에서 열린 추모식은 심할 정도로 간결하여 더욱 큰 통렬함을 느끼게 하였다. 5분간의 묵념, 국왕 내외의 헌화, 홀로 앉은 첼리스트가 켜는 파블로 카잘스의 '새들의 노래'연주로 끝난 10여 분의 추도 모임은 시간과 공간을 한꺼번에 얼어붙게 한 듯싶었다.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과 지난해 참사를 저지른 테러범들의 모국 모로코의 국왕 모하메드의 포옹은 그 자리에 함께한 모든 사람의 아픔과 소망을 상징하는 매우 뜻 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각 대륙에서 모인 60여 명의 전.현직 국가원수와 정부수반들 및 국제사회의 대표들은 인류와 지구촌이 직면한 오늘의 시련과 앞으로의 운명을 함께 걱정하는 유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테러리즘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켜갈 것인가 하는 과제는 결코 한 도시나 한 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인류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하는 공동의 임무라는 강력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전투요원이 아닌 무고한 시민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테러리즘은 어떠한 경우나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인류사회의 철저한 응징의 대상으로 규탄받아 마땅하다. 그러기에 테러리즘을 예방하고 제어할 수 있는 구체적 전략과 방법의 체계화를 위하여 전문적인 연구와 창의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그것은 무엇보다도 많은 나라의 정치적 의지와 결단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바로 그러한 노력과 결단을 촉구하는 '마드리드 어젠다'가 만장일치로 채택된 것은 테러리즘의 위협에 대한 범세계적 긴장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테러리즘에 대처하는 범세계적 시민사회네트워크를 만들자는 제안과 대량살상무기, 특히 핵무기확산방지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솔라나 유럽연합(EU) 외교대표의 지적도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테러리즘이 말끔히 근절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자기의 생명을 내던지며 소신에 따라 감행하는 자살테러를 철저히 예방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이 9.11테러 이후 더욱 확실히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속되는 테러의 위기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테러리즘의 근본적인 원인과 동기를 찾아내고 그 개선책을 모색해 나가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빈곤, 불평등, 억압, 분노 등 현대사회의 병리적 요소를 진단하고 이에 대한 처방을 마련하는 국제사회의 노력이 조속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태는 더 악화할 수도 있다.

테러리즘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상황의 긴박성에 떠밀려 법절차를 우회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민주적 가치와 절차를 우회하는 자가당착은 테러 피해 현장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특히 이번 마드리드회의에서는 수없이 고발되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강점은 법을 지키는 데 있고 테러리즘의 약점은 법을 무시하며 도전해 나간다는 단순한 원리가 테러의 여파로 인하여 잊히는 것을 막기 위하여 국제사회가 경각심을 한층 드높이자는 합의를 이루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끝까지 지키려는 민주적 가치와 제도, 절차는 테러의 위기 속에서 민주사회를 지키는 최선의 길임을 3.11 추모의 날에 재확인할 수 있었다. 1975년 오랜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해방되어 '민주화 제3의 물결'을 주도하였다고 자처하는 스페인이 3.11테러의 처리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수호와 발전을 위한 국제사회의 연대를 주창하고 나선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는 특정지역이나 문화에서만 가능하다는 인종 및 문화 차별주의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인 인권의 보편성을 국제사회가 다 함께 다짐하기로 뜻을 모으게 된 것 역시 더불어 평가되어야 한다. '유럽에 기독교민주당이 있듯이 아랍권에도 무슬림민주당이 자유선거에서 경쟁하는 시대를 기다린다'는 한 이집트 재야 대선후보의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