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In&Out 맛난 만남] 만화가 이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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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나 명절 때만 구경할 수 있는 게 고기였다. 그나마도 어른들 상을 기웃거리며 젓가락만 빨고 있다가 운이 좋으면 한두 점 얻어 먹는 게 고작. 그래서 소년은 이담에 크면 만화가게 주인이 돼 정육점 집 딸과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 좋아하는 만화책을 실컷 보면서 배불리 고기를 먹고 살겠다는 속셈이었다. 꽃잎 모양으로 촘촘히 기름이 박인 선홍색 살코기가 불판 위에서 '피식' 소리를 내며 익어간다. 이제 50줄을 넘긴 소년은 잔 가득 맥주를 채우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20여 년을 만화에만 묻혀 살았고, 이렇게 고기도 양껏 먹을 수 있게 됐다. 어쨌든 어릴 적 꿈을 이룬 셈 아니냐는 것이다.

▶ 일단 술잔을 부딪쳐야 마음을 터놓게 된다는 "주당" 만화가 이현세(左). "로버트 태권브이"의 김청기 감독이 합석했다.

이현세. '대한민국 대표 만화가'인 그를 서초동의 한 고깃집에서 만났다. "고기 질도 좋지만 함께 나오는 음식들이 다 푸짐하고 맛있다"며 그가 고른 곳이다. 마침 선약이 있는 날이라 했다. 둘보다는 셋이 마주 앉는 편이 이야깃거리가 많을 것 같아 한자리로 만들었단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로보트 태권브이''우뢰매'의 김청기 감독. 서로 팬인 두 사람이 사적인 자리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했다.

"감독님께서 술을 좀 즐기셨다면 좋았을 텐데. 술자리에 안 오시니 도통 만나 뵐 기회가 없었어요."

소문난 주당인 그는 앉은 자리에서 양주 두 병을 비운 적이 있을 정도다. 술을 마시지 않은 날이 거의 없어 집에서 "보약도 그 정도로 먹으면 병이 생기겠다"는 핀잔을 듣는단다. 반면 김 감독은 맥주 두세 잔이 주량이다. 오랫동안 비슷한 길을 걸어왔지만 '술 급수'가 달라 이제서야 모시게 됐다는 것이 그의 해명이다.

맥주 거품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김 감독이 "후배들 데리고 자주 오는 집이겠구먼"하고 말을 꺼낸다. 여관방에서 라면과 과자로 끼니를 때우며 '로보트 태권 브이'의 시나리오를 쓰던 시절, 어쩌다 돈이 좀 들어온 날엔 후배들을 불러 모아 고기부터 구웠다. 일인당 고기 몇 점씩 할당량을 정해가며 먹어야 했지만, 붉은 기가 가시자마자 소금을 찍어 한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던 그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생등심이 지글지글 기름진 소리를 내며 옛 기억을 익히는 동안 종업원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직접 만들어 금방 솥에서 꺼낸 모두부다. 그가 "먼저 양념 없이 두부만 먹어보라"고 권한다. 두부 위에 묵은 김치 한 가닥을 죽 찢어 올려 먹거나 새콤한 양념을 얹는 것도 어울리지만, 자체의 은근하고 깊이 있는 맛을 놓치지 않으려면 맨 두부부터 씹어보라는 것이다. 가장 즐기는 음식 중 하나로 두부를 꼽는다는 김 감독이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2년 후에는 모든 연재를 끝내고 화실을 정리할 것"이라고 담담하게 그는 말했다. 입 속에서 부드럽게 갈라지던 두부가 순간 목에 걸리는 느낌이다. 막 "최고의 자리를 지켜가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 참이었다.

"나는 단골 식당을 정하는 기준이 '밥'이에요. 촉촉하게 잘 된 흰 쌀밥이면 간장만 있어도 몇 그릇 비우지. 밥은 기본이고 정성이거든. 제대로 된 밥을 내놓지 못하면 식당이라고 할 수 없잖아요."

'밥'보다 '숭늉'부터 찾는 현실에 지쳤다는 이야기다. 만화가 좋아 열정만으로 뛰어들던 낭만은 사라졌다. "만화가는 한 달에 얼마 벌어요? 유망해요?"라는 질문부터 하는 요즘의 풍토가 그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6년간 붓을 놓게 했던 '천국의 신화' 외설 시비도 이런 생각을 굳히게 했다. '신명'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조용히 듣고 있던 김 감독이 "아직 숙제가 하나 남아 있지 않아"하고 운을 뗀다. 1996년 약 3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야심차게 만들었으나 흥행에 참패했던 애니메이션 '아마게돈' 이야기다. "이현세가 만들어도 안 되더라"며 투자자들이 애니메이션에서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됐었다.

"변화가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나간 건 아니거든. 예전엔 기술 수준에 맞춰 작품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불가능한 게 없어. 그러니 나 같이 '오래된 사람'도 3D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어."

김 감독은 최근 역사 3D애니메이션 '광개토 태왕' 제작에 착수했다. 선배의 격려에 그의 표정이 밝아진다. 언젠가 '천국의 신화'를 청소년 대상의 TV용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더랬다.

"정말 맛있는 음식이 나왔는데 숟가락을 놓으면 어떡하느냐"며 그가 도루묵찜 그릇을 앞으로 끌어당겨 준다. 고추장에 진간장.파.마늘 다진 것을 넣고 만든 양념장에 도루묵을 재워 두었다가 간이 충분히 배면 찜통에 넣어 쪄낸다. 몸이 작아 오랫동안 찜을 하면 구수하게 뼈째 먹을 수 있는 훌륭한 칼슘 공급원이다. 푸짐하게 담긴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은 이야기를 계속하려면 조만간 다시 만나야겠다"는 김 감독의 말에 그가 환하게 웃었다.

글=신은진 기자<nadie@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 이현세가 소개한 고기집 '한 상'

유리로 된 오픈 주방에서 고기를 다듬어 고객들이 눈으로 질을 확인하게 한다. 특제 양념을 자랑하는 양념갈비는 1대(280g)에 3만2000원, 생등심은 150g에 3만3000원이다. 직접 만드는 모두부가 별미다. 서초역에서 예술의 전당 방향. 02-581-9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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