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영화] 주먹이 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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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류승완
주연:최민식.류승범
장르:드라마
등급:15세
홈페이지: (www.fist2005.com)

20자평: 복싱 챔피언은 힘들다. 영화 챔피언은 더 힘들지 모른다.

류승완(32) 감독은 영화가 없었다면 지금 존재할 수 없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동생 승범과 함께 할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공사장 인부, 군고구마 장사 등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영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2000여 편의 비디오를 보며 영화를 독학했고, 남이 쓰고 남은 자투리 필름으로 찍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년)를 내놓으며 소위 충무로의 양지로 진입했다. 또 '피도 눈물도 없이'(2002년), '아라한 장풍 대작전'(2004년)을 잇따라 발표해 최근 '주먹이 운다' 시사회장에서 그가 수줍게 밝혔듯이 "작품 편수로는 중견감독" 대열에 합류했다.

감독은 시사회장에서 "이번 영화를 찍으며 인생을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주먹이 운다'는 가슴 찡한 휴먼 스토리다. 아무런 희망없이 오직 '사각의 링'을 지렛대 삼아 힘겹고 고달픈 삶에 전환점을 찍으려는 두 남성의 얘기가 눈물샘을 강하게 자극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도 손수건을 찾을 수밖에 없는 장면을 영화 막바지에, 그것도 꽤 오랜 시간 심어놓았다.

하지만 감독은 '인생을 더 배우고, 영화를 더 배워야' 할 것 같다. 갑자기 끓인 물이 쉽사리 증발하듯 그가 이번 영화에서 끌어내는 눈물은 휘발성이 강하다. 소금기가 적은 눈물이랄까. 여느 영화 이상으로 마음이 아리지만 여운은 깊지 않다. 1960년대 한국 액션영화에 심취하고, 또 액션 연출에 재주가 뛰어난 그의 개성은 눈이 찢기고 얼굴에 피가 맺히는 복싱 경기를 다룬 이번 영화에도 유감없이 드러나나 박진감 넘치는 화면을 떠받치는 스토리가 허약하기 때문이다.

아니 얘기가 약하지 않고 매우 극적인 반면 지나칠 만큼 상투적이고 감상적이라 공감하기가 어렵다. 기승전결의 흔한 플롯을 배제하고, 주먹말고는 기댈 게 없던 두 사나이가 막판 신인왕 결승전에서 마주치는 설정 자체는 살 만하나 각 캐릭터의 사연 사연, 또 전개방식이 '류승완 영화'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이하다.

'주먹이 운다'에선 두 개의 줄거리가 막판에 하나로 합류한다. 베이징 올림픽 복싱 은메달리스트였으나 지금은 사업에 실패해 거리에서 남의 주먹을 맞으며 돈을 버는 강태식(최민식)과 소년원에서 마음을 잡고 그간 못한 효도를 복싱으로 보답하려는 '양아치' 청년 유상환(류승범)의 기구한 인생을 번갈아 보여주다가 그들의 한 맺힌 혈투로 134분간의 대미를 장식한다. 신인왕 결승전 장면, 못난 아버지를 찾아오는 태식의 아들과 철없던 손자 상환을 보러오는 할머니의 얼굴이 겹치는 순간 관객은 크게 흔들린다.

그러나 연출 의도가 그대로 엿보이고, 두 인물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은 탓에 '영화적 충격'은 그리 강하지 않다. 바탕이 선한 만큼 다른 사람에게 이용만 당하는 태식도 '파이란'에서 보았던 최민식의 캐릭터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실직.부도.탈선.방황에 춤추는 요즘 세상을 달래주고, 배우들의 주먹 또한 설움과 회한에 울고 있지만 영화 자체는 크게 울리지 못하는 것이다. 울음에도 종류가 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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