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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꺾인 알제이 연금 7일(3)|개회식불참 북괴공작때문|기자는 회의장입구서 입장 저지|10명대표중 4명만 참석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파리=장덕상 특파원 전보】

<지연작전에 대처>
10일밤 최 장관등 우리대표들과 「뮤스랑」「알제리」외무성의전장과의 사이에 있었던 1시간25분동안에 회의는 이것이 하나의 신경전이요 지연작전이라고 우리대표단은 판단했다.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버티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나중에 안ㄴ일이지만 개회식에 만일 한국대표가 참가한다면 회의장에 나타나지않겠다는 공산계외교단 및 북괴의 공작과 압력으로 적어도 개회식에만은 한국대표를 참석시키지않겠다는 방침이 섰던 것이다.
연금된후 시내로 나온 것은 12일 상오영시15분 숙소를 옮길때까지 처음이었다. 그리는 쥐죽은 듯 고요하고 곳곳에 순찰경관이 서있는 외에는 일반행인은 보이지 않았다. 오락시설이 없고 아침일찍 일터로 나가야하는 그들에게 통행금지 시간은 없다하더라도 밤을 즐길수가 없는것같았다.
우리 대표단이 「크룹·데·펭」으로 숙소를 옮긴다음날인 12일 아침에야 『한국대표가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는 통고를 받았다.

<기자에 귀국종용>
본기자는 여러번 본사에 전보를 치려했지만 그때마다 실패했다.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전보를 치려 했을때는 의전관이 시내에 들어가서 치라고 견제하면서 내일아침에 공보부에서 직원이 나올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아무리 기다려도 직원은 나타나지않았으며 의전관도 꿀먹은 벙어리였다.
「알제리」당국은 솔직히 말해서 기자들은 돌아가주었으면 좋겠다는 눈치를 보였다. 그러나 거기까지 취재하러갔던 우리도 물러설수는 없었다.
며칠동안 시경전을 벌였다. 우리는 회의장 취재를 위해 여러번 회장에들어가 보려했지만 그때마다 쫓겨나고 말았다. 또 매일같이 보사에다 전보를 치려했고 전보「카드」를 제시했지만 결국 못치고 말았다. 외무부에서 보낸 전보를 대표단이 받지 못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호송차로 회의장에>
도착해서 이틀동안 기자 두사람은 대표단과 함께 기거했고 다음에도 숙소는 달랐지만 같은 환경에서 지냈다. 대표단과 기자는 소위 「국빈대우」를 받았으며 「알제리」정부가 제공하는 음식도 괜찮아 큰 물질적 불편은 없었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은 말할수 없이 컸다. 남국의 아침은 일찍 밝았다. 12일아침 9시30분 이번 외교에 하나의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아침일찍부터 초조하게 기다리는 대표단 숙소로 세대의 까만 「푸조403」차들이 도착했다. 한표기 대사, 심병원 통상국장, 성태혁 국제경제과장, 이호웅 상공부해외시장과장등 네 대표가 의전국직원 6명의 안내를 받고 회의장으로 출발했다. 회의장과 대표단 숙소사이는 3백미터의 가까운 거리. 불과 2, 3분만에 달려 회의장에 도착했다. 걸어갈수는 없었고 항상 호위병이 따르는 차를 타고 회의장을 내왕하도록 돼있었다.

<토론말고 돌아가라>
우리 대표단은 9시40분쯤 회의장에 들어가고 기자가 그뒤로 들어가려하던찰나 의전장이 나타나 『기자들은 안된다. 집으로 돌아가라』로 호통을 친다. 『왜 안되느냐?』고 따지려하자 그는 『토론은 말자. 돌아가라』고 하며 경호원을 불렀다. 이래서 제1차회의장 취재는 실패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으나 참을 도리밖에 없었다. 밖에서 본 회의장은 웅장하고 화려했다. 그러나 「팔레·데·나숑」입구 5백미터 앞부터 수백개의 국기 게양대가 있었지만 띄엄띄엄 「알제리」기가 꽂혀있을뿐 다른나가기들은 하나도 게양되지않아 86개국이 참가한 이「매머드」국제회의장은 한가하기 짝이 없었다.
회의장에 간 대표단은 상오 11시15분쯤 숙소로 돌아왔다. 심벼원 외무부통상국장에 말에의하면 한국대표단이 「아시아」「그룹」회의에 입장하자 각국대표들이 모두 일어서서 박수로 환영했으며 사회를 맡고있던 「브릴란테스」의장은 『지금까지 한국대표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한국대표의 자유로운 회의 참석이 보장되지 않는한 이회의는 계속될수 없다』고 말하여 우리대표를 격려했다.

<각국대표들 환호성>
「아시아」「그룹」회의가 끝나고 11시25분쯤 최장관과 심국장은 처음으로 본회의에 들어갔다. 우리대표단은 10명이었지만 인원제한이 있어 4명밖에 회의에 들어가지 못했다. 본회의에서는 별다른 일은 없었고 한국대표가 들어온데 대해 각국대표와 기자들이 주목했고, 사진을 찍고 또 인사를 걸어왔다. 이 회의에 참석하고 온 한 대사는 회의가 끝나자 기자들이 몰려와 『어디에 있었느냐, 편안하냐?』고 묻고 「오스트리아」의 한기자는 『한국기자는 왜 회의장에 나타나지 않느냐』고 물어와 답변에 진땀을 뺐다고 말했다.
이날 처음으로 국내신문 보도를 알게됐다. 『한국대표가 「알제이」도착 및 회의참석에 성공했다. 한국대표단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는 국내신문의 보도와 논조를 재불한국대사관이 보낸 전문으로 알게되어 모두들 한번더 용기를 얻게 됐다.

<우리 전문은 검열>
그러나 이곳에서 보낸 두차례의 전문에 회답이 없는것으로봐서 우리들이 보내는 전문은 어디선가 검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 검열을 우려하여 영문으로 기안하고 안부만을 전했으나 1, 2신은 어디론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저녁7시 「알제리」의전국직원이 왔다.
『기자「클럽」에 가입시켜라. 외신기자 숙소로 보내달라. 회의취재와 통신의 자유를 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는 『내가 답변할 수 없는 문제다. 당국과 의논하여 내일아침 회답해주겠다』고 약속하고 떠났다.
이날 회의는 하오6시50분 모두 끝나고 대표단도 무사히 돌아왔다. 우리 대표단은 회의장안에서는 물론 화장실까지도 감시원이 따라다니며 다른 대표와의 환담이나 외국기자들과의 접촉을 결사적으로 막았다고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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