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택 산은금융지주 회장 직격 인터뷰] "나 낙하산 맞다, 결과로 보여주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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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택(61) 산은금융지주회장은 정면돌파를 작정한 듯했다. 그는 “나 낙하산 맞다. 결과로 보여주겠다”며 자신에게 붙은 낙하산 낙인을 흔쾌히 인정했다. “그 업종에 계속 종사하다 수장으로 올라서는 경우가 아닌 것을 낙하산으로 정의한다면 낙하산 맞다. 그런 기준이라면 관료 출신도 낙하산으로 분류돼야 한다”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홍 회장은 낙하산 인사 논란의 한복판에 서 있다. 그는 박근혜정부가 단행한 첫 번째 공기업 기관장 인사였다. 더구나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측근인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을 내보낸 자리에 앉은 그다. 이는 새 정부의 공기업 기관장 자리도 이전 정부와 다를 것 없이 낙하산으로 뒤덮일 것이란 실망감이 시중에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삼성카드와 동양증권의 사외이사, 한국투자공사(KIC) 운영위원,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 등을 지내며 약 23년간 금융전문가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가 갖춘 전문성은 “금융회사 경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간단한 논리에 덮여버렸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때는 역량보다 기행으로 자주 소개됐다. 기자들에게 고생한다며 귤을 나눠주기도 했고, 우산을 펼쳐 카메라 플래시를 가리기도 했다.

박근혜정부 금융정책 밑그림 그려

 그는 인터뷰 시작 전 “인수위에서 수업료를 톡톡히 치렀다. 기자는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말하면서도 면담과 전화로 이뤄진 두 차례 인터뷰 내내 진솔하게 답변했다.

 -박 대통령과의 인연은.

 “서강대 다닐 때 박 대통령이 나보다 1년 선배였다(박 대통령은 70학번, 홍 회장은 71학번). 당시 경호원 두 명과 함께 검은색 지프차를 타고 온 박 대통령이 학교 입구에서 내려 걸어오는 것을 멀리서 보곤 했다. 그 시절에 미니스커트가 유행이었는데, 박 대통령은 무릎 밑으로 내려오는 스커트를 입고 다녔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때 박 대통령을 도우면서 처음 만났다. MB정부 출범 이후 박 대통령의 경제 공부모임에 참여하게 됐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 안종범 의원 등이 멤버였다(그는 박 대통령의 경제 멘토 중 한 명이라는 표현에 손사래를 쳤다. “멘토까지는 아니고 현안이 있으면 정리해서 설명하는 정도”라고 말했다).

 -부인(전성빈 서강대 교수)이 박 대통령과 절친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니다. (캠퍼스 커플인) 아내도 나와 같은 71학번인데, 나처럼 박 대통령을 먼 발치서 보는 정도였다. 지금까지 박 대통령과 얘기 한 번 나눠본 적이 없다. 기자들은 누군가가 짐작해서 쓰면 다른 곳에서 베껴 써서 사실로 만들어버린다. 그런 게 너무 많다.”

 박근혜정부에 쏟아지는 비판 중 하나는 금융정책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부가 금융에서 제일 먼저 취한 조치는 산업은행 민영화 중단이었다. 대신 산은·수출입은행·정책금융공사 등으로 산재돼 있는 정책금융기관 체제 개편에 착수했다. 인수위에서 이 구도를 그린 이가 홍 회장이다. 박 대통령은 정책금융기관 개편의 밑그림을 그린 장본인을 산은 회장으로 보낸 것이다.

산은, 정책금융기능 다시 강화해야

 -산은지주 회장으로 받은 임무는.

 “명시적인 것은 없다. 인수위 때 정책금융기관을 들여다봤다. 우선 산은 민영화가 옳은 방향인지를 점검했다. 둘째, 창조경제 그림을 그리다 보니 산은과 관련되겠더라.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고위험-고수익)이란 말이 있듯 리스크 테이킹(위험 감수)을 해야 창조경제가 된다. 셋째 몇몇 대기업이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데 그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떠받칠 기관이 필요하겠더라. 금융기관과 대기업이 자율협약을 맺을 때 누군가는 주도해야 한다. 그걸 산은이 맡아야 한다.”

 -그런 일을 정책금융공사가 하면 되지 않나.

 “정책금융공사 인원이 400여 명이다(산은 인원은 2900명). 정책금융공사의 규모와 역량이 산은에 못 미친다.”

 홍 회장은 산은 민영화를 할 수 없는 세 가지 현실 논리를 댔다. 우선 대외환경 변화다. 그는 “금융위기로 거품이 꺼지면서 산은의 자산 밸류가 낮아지고 산은이 할 수 있는 딜(deal:거래)이 적어졌다.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둘째는 내부 사정이다. 그는 “기업공개(IPO)를 하려면 산은의 기초체력이 좋아야 하는데 아쉽다”고 말했다.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대기업들이 하나 둘 생기면서 산은의 기초체력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셋째는 대안 부재다. 정책금융 전담기관으로 설립된 정책금융공사의 역량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 민영화 중단 이후 외국 투자자로부터 항의는 없었나.

 “보고 받은 바 없다.”

 - 그렇다면 산은의 역할은.

 “금융에 위기가 발생했을 때 민간회사가 다 받쳐줄 수 없다. 대기업의 유동성 위기와 벤처 지원은 산은이 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뒤에서 받쳐주니까. 산은이 예전의 정책금융 기능을 다시 강화해야 한다.”

 이로써 향후 5년간 산은의 행보는 분명해졌다. 대표 정책금융기관이었던 과거로의 복귀다. 산은의 역대 수장은 관료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홍 회장처럼 적극적으로 정책금융 강화를 부르짖은 이는 드물었다. 홍 회장은 그러나 산은이 주도하고 있는 몇몇 대기업 구조조정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아직 최종 결정이 이뤄지지 않은 듯했다.

 - 대기업 부실 처리 원칙은.

 “기업주에게 부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기업 존속 여부는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개별 금융기관에 주는 영향을 균형감 있게 따져서 결정해야 한다. 대마불사가 원칙이 돼선 안 된다.”

 - STX조선은 자율협약이 결정됐지만, STX팬오션은 어떻게 되나.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 인수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채권·채무를 다 인수하는 것도 있고, 당사자 간 채권·채무를 어느 정도 정리한 뒤 인수하는 방법도 있다.”

 - 대우조선해양과 대우건설 지분은.

 “매각이 원칙이다. 시장 상황을 봐가면서 매각해야 한다. 산은 본연의 업무와도 벗어나는 것이고, 금산분리에도 위배된다. 산은이 경영 노하우가 있는 것도 아니고.”

 - 전임 회장이 적극 확장한 소매금융은.

 “정책금융을 강화하면 굳이 고객 예금으로 자금을 조달할 필요가 없다. 예전처럼 공세적으로 하긴 힘들 것이다.”

 - 지금 산은에 제일 필요한 것은.

 “민영화를 추진하면서 조직이 좀 이완돼 있었다. 잘 추슬러서 산은이 도약하도록 이끌겠다.”

 홍 회장은 인터뷰에서 “내실을 다지는 게 우선이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큰 그림을 그리기보다 차곡차곡 쌓아가겠다. 그러다 보면 경쟁력이 강화되고 기업 가치가 커지고 모든 게 쉬워진다”는 말도 했다. ‘백면서생’이란 세간의 선입견을 불식시키겠다는 홍기택식 출사표였다.

글=이상렬·이태경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홍기택 경기고와 서강대 경제학과를 거쳐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국제금융·거시경제 전문가로 명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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