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의 미래] 카스피해 물밑의 헤게모니 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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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해의 석유 쟁탈전은 결코 첩보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도 기자들의 자제력으로 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벌써 여러해째 몇달 간격으로 카스피해의 지배권을 둘러싼 해묵은 ‘건곤일척의 게임’이 위험한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런 스토리는 늘 러시아와 영국이 19세기 이 지역의 헤게모니를 놓고 다툰 전쟁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 다음 카스피해의 풍부한 석유자원을 놓고 새 열강과 첩자들이 충돌을 빚는 가운데 외교적 술책이 계속되고 있다고 경고한다.

진부한 이야기라고 해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진짜로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생겼다. 이 지역에서 석유전쟁과 폭력사태의 가능성이 새롭게 부상하고, 공개적으로 패배를 시인하려는 측이 없는 가운데 아직은 게임 종료를 선언하기가 이르다. 그러나 여러해 동안의 결론 없는 승강이 끝에 이 건곤일척의 게임에서 어느 나라와 어느 기업이 승자인지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카스피해 유역에는 줄잡아도 7백억배럴의 석유가 매장돼 있어 중동을 제외하면 최다 부존량 가운데 하나다. 이 건곤일척의 게임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누가 석유를 차지하고, 누가 그 석유를 세계시장으로 운송하는 송유관을 관리하느냐는 것이다.

관련기업들 중에서는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과 이탈리아의 ENI 및 미국의 셰브론 텍사코가 중대한 송유관 루트와 매장 원유에 대한 권리를 갖는 것 같다. 나라별로 보면 카자흐스탄이 확실한 승자다.

현재 카스피해 전체 원유 매장량의 75%를 소유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미 1백억∼1백70억배럴의 원유 매장량이 확인된 카자흐스탄은 이로써 산유부국 대열에 합류할 참이다.

미국은 또 전략적 승리를 기념할 수 있다. 카스피해 석유의 송유관에 대한 러시아의 오랜 독점을 종식시킨다는 목표가 달성되기 직전이다. 그 전략은 옛 소련의 마지막 날들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소련의 남부 변방과 이란 사이에 거대한 유전들이 끼여 있는 것이 발견됐다. 서방의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러시아의 뒷마당에서 일한다는 데 대한 두려움 없이 그 유전 개발에 뛰어들었다.

한편 미국 정부는 카스피해에서 나오는 적어도 한개의 새 송유관이 터키를 경유함으로써 러시아를 우회하도록 꾀를 부렸다. 이 루트를 통해 카스피해 연안 공화국들은 석유와 러시아로부터의 경제적 독립을 얻을 뿐 아니라 이란도 우회할 수 있을 것이다.

9·11 이후 미국인들이 아랍산 석유에 의존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카스피해 석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따라서 승자로 떠오른 셰브론 텍사코가 미국 회사라는 것과 송유관 전투 역시 미국의 뜻대로 돼간다는 것은 미국 정부로서는 희소식이다.

미국 정책의 핵심은 아제르바이잔 바쿠의 카스피해 연안에서 그루지야를 거쳐 터키의 지중해 항구 제이한으로 가는 송유관 개발의 추진이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루트의 안전성, 자금조달, 아제르바이잔 유전의 규모에 대한 의혹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30억달러 규모의 이 프로젝트는 올 6월 착공된다.

2005년 초에는 석유공급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9·11 이후 이 프로젝트를 완공하려는 사람들의 각오가 대단하다”고 바쿠∼제이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BP의 대변인 마이크 빌보는 말했다. “사람들은 차제에 에너지源을 다양화할 필요성을 깨달은 것 같다.”

러시아는 작전상 후퇴를 택한 것 같다. 이웃나라들에 대한 영향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는 보리스 옐친 시절 국지전을 부추겨 서방세계의 카스피해 석유 개발을 방해하려고 애썼다.

후임자 블라디미르 푸틴은 그 싸움을 포기하고 서방의 영향력을 대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러시아 기업들은 카스피해의 많은 유전에서 짭짤한 작은 지분들을 갖고 있으며 미국과 파트너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냉전시대의 전투처럼 분명한 전선이 형성된 것은 아니다. 미국과 러시아 정부는 항상 반대편에 서 있는 게 아니며 러시아는 카스피해 지역의 관리들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푸틴은 러시아의 부활을 노리는 것 같다. 카스피해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러시아 정부가 이끄는 일종의 ‘미니 OPEC’라 할 지역 공급 카르텔의 토대를 쌓았다.

지금까지는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들을 만나봤다. 혹시 자기네가 러시아 제국의 그림자라도 부활시키는 데 일조하지 않을까 경계하는 아제르바이잔과는 달리 중앙아시아 제국은 이 문제에 좀더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현재 작성 중인 계획에 따르면 카스피해는 2012년께 하루 7백만배럴을 생산해 수출할 수 있을 것이다. 산유대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현 수출량과 맞먹는 물량이다.

요즘은 카자흐스탄의 카샤간 유전을 놓고 경쟁이 치열하다. 이탈리아의 ENI가 운영하는 카샤간은 2008년부터 석유를 뽑아 올릴 예정이다. 러시아는 카샤간 석유가 자국 송유관을 통해 멀리 발트해의 항구들로 운송되기를 바란다. 미국은 그 대신 유조선에 실려 바쿠로 간 뒤 바쿠∼제이한 송유관으로 운송되기를 바란다.

ENI와 카자흐스탄 정부는 이란의 송유관과 페르시아灣으로의 짧은 링크도 조사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6년이나 남았다”고 카즈트랜스오일社 부사장 카이르겔디 카빌딘은 말했다.

미국 法은 이란과 거래하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重제재를 가하게 돼 있는데 외국 기업들도 예외가 아니다. 1990년대 후반 ENI와 BP 같은 유럽 석유회사들은 이란과 거래하고도 미국의 보복을 당하지 않았지만 그건 옛날 이야기다. 지난해 8월 부시 정부는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5년 연장했다. 게다가 이란을 ‘악의 축’으로 꼽았다.

이란은 이번 카스피해 석유 쟁탈전의 패자인 것 같다. 분노한 이란 정부는 여차하면 전쟁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지난해 7월 이란 전투기 두대와 전함이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이 모두 소유권 주장을 벌이는 유전에서 지진실험을 하러 가던 BP의 탐사선 지오피지크 3號에 위협을 가했다.

이란 전투기들이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근처까지 출격했고 테헤란 라디오 방송은 아제르바이잔 국경 근처에서 ‘경계’ 차원의 병력이동을 발표했다. 이란의 한 고위관리가 “아제르바이잔은 과거에 이란 땅이었다”는 협박성 발언을 하자 터키는 정치적으로나 핏줄상 동맹국인 아제르바이잔이 ‘제2의 쿠웨이트’가 되도록 방치하지 않겠다고 응수했다.

무력시위는 곧바로 진정됐다. 이란은 카스피해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행동으로 옮길 만한 힘이 없다. 이란 정부는 카스피해가 호수라고 주장한다. 그 경우 해양법상 수중 유전의 20% 몫을 주장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는 바다라고 반격한다. 그래야 자기네 몫이 커지고 이란 몫은 12% 미만으로 줄게 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상관없는 문제”라고 카스피해 역사를 연구한 귀베 미르펜데레스키는 말했다. “카스피해가 호수가 되든 바다가 되든, 또는 욕조로 결론이 나든 문제는 누가 협상에서 가장 유리한 입장인가 하는 점이다.”

메이저 석유회사들로서는 다행히도 대형 유전들은 시비에 휘말린 영토 내에 있지 않다. 이제 미국은 이 지역에 처음으로 군사력을 주둔시켰다.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우즈베키스탄에 병력을 파견하고 그루지야에는 군사고문단을 보냈다.

그러나 카스피해 지역에서, 특히 그루지야가 오사마 빈 라덴의 색출보다는 석유 루트에 중심 역할을 한다는 점을 모르는 나라는 없다. 첩보소설가들이여, 연필을 다시 깎으시라.

출처:뉴스위크 Owen Matthews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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