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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빠져든다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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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팬덤(fandom)’에도 일종의 등급이 있다. 회원수의 많고 적음을 따지는 요즘의 ‘아이돌 팬클럽 서열’ 같은 게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주변에(특히 부모님께) 얼마나 당당히 밝힐 수 있느냐’로 가름되는 이를테면 ‘마음의 등급’인데, 이 기준으로 따지면 ‘명문대 다니는 싱어송라이터 가수’를 좋아하는 경우는 꽤 높은 레벨에 속한다. 나의 ‘팬질’에 대한 주변의 이해도가 낮을수록(엄마의 욕설과 핍박이 거셀수록) 등급은 내려간다. 하지만 신기한 건 등급이 하강할수록, 사랑은 더 뜨겁고 열정은 무한히 뻗어간다는 사실이다.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인 사회였을 1950년대, 남장여자들이 출연하는 ‘여성국극’의 팬으로 산다는 것 역시 꽤 고단한 일이었을 게다. 18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은 이 여성국극과 사랑에 빠져 일생을 바친 이들을 그린다. 1940년대 후반, 남성 중심으로 운영되던 국악원을 나온 여성들이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한다. 이들은 ‘무영탑’ ‘선화공주’ 등 역사적인 소재를 주로 다룬 일종의 ‘국악 뮤지컬’을 선보였는데, 파격적인 이 공연에 대한 당시 반응은 대단했다 한다. 여성국극단이 잇따라 생겨나고, 남장을 하고 호쾌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에 반해 가출, 혈서, 자살 소동까지 벌이는 열혈소녀팬들이 등장했다.

영화 ‘왕자가 된 소녀들’. [사진 영희야 놀자]

 하지만 전성기는 길지 않았다. 국가의 지원에서 제외되고, ‘저질’ ‘싸구려’라는 폄하에 시달리면서 여성국극은 쇠락의 길을 걷는다. 영화는 조금앵·김혜리·이옥천 등 당대 최고 인기를 누렸던 여성국극 스타들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며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시대를 풍미한 별들의 뒤안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명맥이 끊어져가는 한 예술장르에 대한 재조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고정된 성관념에 맞서 도발을 감행했던, 시대를 앞서간 존재들에 대한 따뜻한 헌사로 읽힌다.

 개인적으로는 ‘빠져든다는 것’의 놀라운 힘을 봤다. 이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뭐가 그렇게 좋았는지 대학 가는 것도 잊고 시집가는 것도 잊고, 밤낮으로 무대만 생각하며 쏘다녔다”고. ‘진짜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뛰어들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분투하는 모습은 당당하고 행복해 보였다. 잊혀지지 않는 대사가 있다. “극단에 찾아오는 애들 중엔 여자 역에 어울리는데 죽어도 남자 역할을 하겠다 하고, 체격도 좋고 남자 배역에 딱인 친구가 여자 역을 하고 싶다는 경우가 있어. 그런데 계속 공연을 돌다 보면 알게 돼.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야, 빛이 나더라고.”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