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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권파 분열로 혼란 더욱 심각|중공「문혁」 5일로 1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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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중공의 문화대혁명, 통속적인 표현으로는 당주석 모택동과 국가주석 유소기 두 세력간의 표면화된 권력투쟁이 8월로써 한 돌을 맞았다. 한 돌이라고 하는 것은 작년 8월 1일부터 12일 사이에 열린 제8기 11회 중공중앙위 전체회의(8기 11중 전회)로부터 기산한 시일이다.
바로 이 회의에서 (1)유소기의 반동적인 노선이 철저히 비판되고 (2)국방상 임표가 모택동의 후계자로 등장하고 (3)문화대혁명 16개 조항이 채택되는 역사적인 절차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표와 군부서 대립해 있던 중공군 참모총장 나서향이 이미 65년 5월께 해임되고 66년 6월에는 북평시장 방진이 해임된 사실이 증명하듯 모·임파에 의한 유소기·등소평의 실권파 제거 운동은 8기 11중 전회를 1년 이상이나 앞지르고 있다. 다만 8기 11중 전회에서부터 모·임파는 해방군을 힘의 배경으로 삼고 홍위병을 탈권 운동의 첨병으로 삼아 물리적인 힘의 공세를 북평·상해에서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유소기에 대한 공개 규탄의 포문이 열린 뒤 1년이 지난 현재까지 「인민일보」나 「홍기」가 연일 『물에 빠진 개를 통타하자』고 역설하고 있는 것은 유·등의 실권파 세력이 여전히 중공각지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시 이 사실은 홍위병을 앞세운 모·임파의 탈권투쟁은 아직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사태는 탈권 투쟁의 미완성이라는 단순한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니다. 지난 7월의 무한사건 하나만 가지고 보더라도 모·임파는 지금 그들의 혁명조반파 내부의 항쟁과 대립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권력투쟁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은 작년 말 노동자·농민이 이에 참여한 것과 금년 초 해방군이 무력으로 직접 개입한 것이다.
특히 금년 1월 4일 상해서 양파의 노동자 사이에 피 흘린 충돌이 일어났을 때 군대가 개입함으로써 노농의 참여와 해방군의 직접 개입이 하나의 접점을 마련케 되었던 것이다.
탈권투쟁이 노농, 특히 농민층에 확대되자 모순은 더욱 심각해졌다. 농민들에 대한 지도간부는 여전히 3년 연속 재해 때 고난을 같이 겪은 실권파의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개인소유를 줄이고 나라에 많이 바치라』는 북평으로부터의 「파사입공」의 지시에 그들은 반발했다.
여기서 해방군 병사의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농민층의 불만 내지 반감은 해방군에게 직접 반영되는 것이다.
해방군 또한 주덕 하룡 서향전 같은 대원로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부터 그 통일전선에 이상이 생겼다.
이같이 복잡한 사정의 배경 때문에 혁명간부, 해방군, 혁명적인 대중을 모택동 노선의 한 밧줄에 묶는 전국적인 「삼결합」운동은 아직은 성공보다는 실패의 기록이 더 많아, 조반파의 내분을 조정하러 간 북평특사 사부치, 공안상, 왕력당 선전부장이 감금되는 무한사건이나 주은래도 수습 못한 광동사태 따위가 빚어진 것이다. 주은래는 광동사태 수습을 포기하고 북평으로 돌아갔고, 모택동은 함포의 엄호사격 아래 친모군을 무한에 상륙시켰다.
전국 29성·시·자치구 가운데 모택동파의 탈권투쟁이 성공하여 혁명위가 수립된 곳은 8월5일 현재 불과 2시4성이라는 통계이고 보면 『물에 빠진 개』의 저항도 그리만만치 않은 것 같다.
관심거리는 무한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무한군구사령관 진재도의 해임이다. 이를 계기로 반모파에 대한 또 하나의 숙군이 단행되는 것이라면 실권파의 반발 또한 격렬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김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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