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49) 읍·면장과 주파수 맞추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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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75년 12월 4일 고건 신임 전남도지사(왼쪽 넷째)가 전남 지역의 읍·면사무소 공무원들을 도청으로 초청해 애로사항을 듣고 있다. 이들은 “이장과 동장의 월급이 2만원이다. 과중한 업무에 비해 보수가 너무 적다” “아침 8시반에 출근해 밤 11시에 퇴근하는 때가 많다. 업무시간을 명확히 해달라” “상부 기관의 업무 지시로 휴일에도 쉬지 못한다. 중복되는 감사가 많아 힘들다”며 고충을 털어놨다. 고 지사는 “일선 공무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사진 고건 전 총리]

전라남도지사가 되자마자 읍·면장 230여 명과 함께 공무원연수원에서 2박3일 합숙 연수를 했다. 도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읍·면장들과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주파수는 코드와는 다르다는 게 내 생각이다. 코드는 일방통행의 닫힌 채널이지만 주파수는 열린 채널이다. 누구나 참여해 의견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다.

 도정을 꾸려 가려면 읍·면장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했다. 전남 도정의 책임자로서 내 행정 원칙과 철학을 알리고 협조를 구할 필요성을 느꼈다. 보고보다는 내실, 서류보다는 현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장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데 주력하는 현장주의 행정을 강조했다.

 잘못된 행정 관행이 있다면 과감하게 버리라고 주문했다. 무엇보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을 지키겠다고 했다. 읍·면장들에게 현장에서 느끼는 문제점을 말해 달라 부탁했고 열심히 들었다.

 합숙 마지막 날 저녁 불고기로 회식을 했다. 읍·면장에게 소주 한 잔씩을 따랐다. 처음 10명 정도는 따라주는 대로 받기만 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나에게 술을 권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받는 시늉만 하며 조금씩 먹었는데도 230여 명과 돌아가며 마시려니 꽤 많은 양이었다. 소주 50잔 정도는 먹은 듯했다.

읍·면장과 주파수를 맞추려는 노력은 효과를 봤다. 도지사 생활을 하는 3년 동안 그들로부터 협조를 받았다. 고마운 일이었다.

 읍·면장과 주파수는 그렇게 맞췄지만 지역사회와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 남아 있었다. 전북은 아버지의 고향이고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전북엔 연고가 있지만 전남엔 없었다. 초임 도지사면서 광주·전남 지역사회의 신입 회원이기도 했다.

 전남매일 이강재 논설위원과 고귀남 전 의원, 박윤종 전남 도정자문위원장(전 의원) 등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강재 논설위원은 나중에 전남매일 주필 자리에까지 올랐다. 고귀남 전 의원은 1988년 서울장애자올림픽대회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박윤종 전 의원은 79년 10월 26일 서울 효자동 한식당 ‘유선’에서 밥을 먹다가 10·26 사건 연락을 받을 때 함께 자리에 있었던 인사 중 한 명이다. 전남과 전혀 연고가 없는 나를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지역사회 원로와 지도층 인사들을 부지런히 만나고 다녔다. 농촌마을로 가면 노인정에 꼭 들렀다. 새파랗게 젊은 도지사를 보는 어르신들 표정이 좀 서먹해 보였다. 넙죽 큰절부터 했다. 반가워는 했지만 어르신들과의 세대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고민이 됐다. 머리카락 색이 희끗해지면 어르신들이 친근하게 느낄 것 같았다. 숙지황이란 한약재를 무와 함께 달여 먹으면 머리색이 하얘진다고 누군가 귀띔했다. 전국에서도 질이 가장 좋다는 전북 정읍 감곡면의 숙지황을 구했다. 숙지황에 무를 넣고 열심히 두어 달 달여 먹었다. 안타깝게도 효과는 없었다. 새치 두어 개가 났을 뿐이었다.

정리=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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