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북 송금 파문] 통치행위냐 아니냐 논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4면

정부가 현대상선을 통해 북한에 2천2백35억원을 몰래 지원한 것이 통치행위인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날 "대북 경협지원을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못박았다.

여권 일각에서도 "대북 지원을 통치행위로 볼 경우 검찰 수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통치행위를 둘러싼 이론은 다양하지만 유신 시절 긴급조치나 계엄령 선포 등은 국가 위기를 막기 위한 통치행위로 인정해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게 대법원 판례다.

그러나 법조계에선 대북 지원이 통치행위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이익이나 정치적 의도가 정말 없었는지 등을 따져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한 혐의 등으로 고발된 전두환(全斗煥)전 대통령의 경우 1995년 7월 1차 수사 때는 통치행위라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공소권 없음)이 내려졌다. 당시 검찰은 "광주 민주화운동 진압과 최규하 대통령 하야, 5공 정부의 탄생 등은 일련의 통치행위로서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다"고 밝혔다.

하지만 검찰은 같은 해 12월 당시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지시로 5.18 특별법이 제정되자 全전대통령을 내란 혐의로 구속했다.

97년 대법원도 全전대통령의 혐의를 인정해 무기징역에 처했다. 쿠데타와 같은 헌정 문란 행위는 통치행위로 볼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검찰 내부에서도 대북 지원이 통치행위로 인정되려면 우선 돈을 준 경위와 의도가 무엇이냐가 명확히 밝혀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특히 2000년 6월 7일 북한에 송금한 것이 같은 해 6월 13~15일 열린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대가인지 등 의혹이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통치행위라는 이유로 수사하지 않는다면 또 다시 국민의 신뢰를 잃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이다.

대검의 한 관계자는 "순수한 남북 화해를 위한 차원이라면 대북 지원 자체를 처벌하기 어렵지만 다른 '뒷거래'가 있었다면 그 경위를 파악해 사법처리 여부를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다른 검찰 간부도 "정부 대 정부 차원에서 비밀 협약을 맺고 돈을 줬느냐, 아니면 우리 측 고위 인사가 모종의 목적을 갖고 북한 권력층에 뇌물성 뒷돈을 줬느냐가 사법처리에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럴 경우 정당한 이유 없이 북한으로 물품 반입을 금지한 남북교류에 관한 법률이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적용도 이론상 가능해진다.

민변 소속 임영화 변호사는 "최고 통치자가 통치행위를 내세워 사법심사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저개발국가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며 "솔직하게 모든 내용을 털어놓은 뒤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법적 책임을 물어서는 안된다는 논리는 인정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김원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