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하루키의 책 표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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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책이 나오기도 전에 ‘독서회’를 연 서점, 발매 7시간46분 만에 ‘초고속 리뷰’를 게재한 인터넷 아사히신문, 지난 12일 0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64)의 새 소설 공개가 일으킨 열풍이다. ‘바다 건너 불’처럼 바라보던 이 소동에 동참, 서점에 딱 한 권 남아 있던 책을 집어 든 것은 표지 때문이었다.

 표지의 줄무늬 그림은 미국의 색면추상화가 모리스 루이스(1912∼62) 만년의 작품. ‘불기둥(Pillar of Fire)’이라는 제목의 가늘고 긴 색면화를 가운데 세우고 좌우에 저자의 이름과 긴 제목(‘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의 순례의 해’)을 적었다. 화제의 책치고는 퍽 단순한 디자인이다. 그런데 ‘색채가 없는…’이라는 제목과 상반되는 다채로운 그림을 굳이 왜 썼을까.

모리스 루이스, 불기둥, 1961, 233.7×121㎝. 오른쪽 작은 사진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 표지.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은 고교 시절 네 명의 친구와 어울렸다. 친구들 모두 성씨에 빨강(赤)·파랑(靑)·흰색(白)·검정(黑)을 뜻하는 한자가 들어 있었지만 자기의 성(多崎)만 색깔과 무관한 것에 미묘한 소외감을 느꼈다. 혼자만 고향을 떠나 도쿄의 대학에 진학한 그가 갑자기 친구들로부터 절교를 당하고 절망에 빠졌다가, 16년 뒤 상처받은 과거를 되짚어가며 회복해 나간다. 주인공의 성씨엔 특정 색 대신에 ‘많다(多)’는 글자가 있다. 즉 ‘색채가 없음’은 여러 색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얘기. “기억을 외면한다고 당신 역사가 바뀌는 게 아냐”라는 여주인공의 말처럼 과거는 어딘가에 계속 존재하고 있으니 용기 내어 대면하라는 긍정의 메시지다. 각각의 색이 서로 평행선을 그리며 흘러내려 한 점의 작품을 완성한 표지 그림이 새삼 달리 보인다.

 루이스는 잭슨 폴록(1912∼56)의 뒤를 잇는 미국의 추상화가다. 묽은 아크릴 물감을 캔버스에 떨어뜨린 뒤 흘리고 스미게 하는 특유의 기법은 폴록처럼 물감을 흩뿌리는 과장된 제스처와 차별화된다. 상징적인 색채 사용으로 사뭇 종교적 느낌까지 자아내는 줄무늬 그림들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뉴욕이 이미 서구 미술의 중심지로 등극했음에도, 루이스는 그곳과 거리를 두고 워싱턴에서 조용히 활동했다. 50세에 폐암 선고를 받고 얼마 후 사망했다. 물감의 유해한 성분을 장기간 흡입한 탓이었다며 애석해하는 이들도 있다. 소설 속 다자키처럼 그 또한 많은 색채를 받아들였던 셈일까. ‘불기둥’은 2002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 이브닝 세일에서 27만3500달러, 지금 환율로 약 3억원에 팔렸다.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