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세력이 농락할 때 조국은 도와준 게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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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셀트리온의 서정진 회장은 16일 “보유 주식을 매각하고 경영권을 다국적 제약회사에 넘기겠다”고 밝혔다. 지난 2년간 공매도 세력의 공격에 자사주 매입 등으로 맞섰으나 역부족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뉴시스]

“한국사회에서 ‘무’에서 ‘유’를 만든 창업자가 계속해서 꿈을 어어가기에는 벽이 높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코스닥 대장주로 꼽히는 셀트리온의 서정진(56) 회장이 16일 경영권 포기 의사를 밝혔다. 보유한 개인 지분을 모두 다국적 제약사에 넘기겠다는 ‘깜짝 선언’을 통해서다.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기도 했다. 그러면서 서 회장은 성공한 기업을 둘러싼 음해와 악성 루머, 악의적인 공매도와 주가조작 세력, 또 이를 외면한 금융당국에 대한 한풀이성 성토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사실 그는 허허벌판 송도 간척지에 바이오공학(BT)기업인 셀트리온을 세워 10여 년간 코스닥 최고 회사로 일궈왔다. 서 회장 자신도 “한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제약사를 만들고 싶었다”는 야심을 기회가 될 때마다 밝혀왔다. 그런 서 회장의 기업가 정신을 꺾은 최대 복병은 언급한 대로 공매도였다.

 주가를 떨어뜨려야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공매도 세력이 코스닥 시장을 중심으로 판을 치면서 코스닥 시총 1위인 셀트리온이 지속적으로 타깃이 됐다는 설명이다. 이를 두고 그는 “탐욕적인 자본 세력에 농락당했다”라고 표현했다. 그는 지난 2년간 수차례 금융당국에 시정을 요구했으나 감시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고 서운함을 밝혔다. 서 회장 자신과 회사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루머도 경영 의지를 빼앗았다.

 ‘판매되지도 않는 제품을 자회사에 팔아 매출을 부풀렸다’는 식의 의혹 제기가 대표적이다. 그때마다 해명을 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의혹만 더욱 커졌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사실 서 회장은 최근 2년간 공매도 수난을 겪으면서 불면증과 공황증에 시달렸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솔직히 조국이 도와준 게 없다. 국내에서는 창조적 기업에 자금을 조달하는 곳이 없어서 1조5000억원의 투자금도 해외에서 끌어왔다”고 그간의 섭섭함을 꺼냈다. 이어 서 회장은 “저의 결정이 한국이 좀 더 창업하기 좋은 나라, 창업자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꿈과 비전을 이어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을 맺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나=서 회장은 지분을 막강한 자본력과 해외 네트워크를 갖춘 다국적 제약사에 매각하겠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도 셀트리온이 글로벌 메이저 제약사들엔 ‘좋은 매물’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제품허가를 받은 관절염 치료제나 제품허가 신청에 들어간 유방암 치료제, 또 임상 마지막 단계에 있는 림프종 치료제 개발이 완료되면 앞으로 5년간 제품별로 각각 6조∼8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수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 회장도 이날 “화이자나 존슨앤드존슨, 프랑스의 사노피 등이 새로운 주인이 된다면 회사에도 이득이 될 것”이라며 지분 취득에 관심을 가질 만한 해외 제약사들을 직접 언급했다. 다만 그는 셀트리온이 해외에 팔리면 다국적 제약사의 생산기지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이 큰 점을 아쉬워했다.

 지분 매각이 예상대로 성공하면 서 회장 역시 2조원 이상의 막대한 자금을 손에 쥐게 될 것으로 보인다. 향후 행보와 관련, 서 회장은 “셀트리온 경영에서 물러나면 가능성 있는 벤처기업을 골라 인큐베이팅 사업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서정진 회장은 누구=서 회장은 건국대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바이오 문외한이다. 삼성전기와 한국생산성본부를 거쳐 대우자동차 임원을 지내다 1999년을 끝으로 샐러리맨 생활을 접었다. 대우차에서 같이 근무하던 12명의 기획실 직원들이 그를 따랐다. 2000년 넥솔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2년여 해외를 돌며 바이오 전문가를 찾아다녔다. 문전박대도 수없이 당했다.

 그가 창업 6년 만에 두각을 드러낸 건 발상의 전환 덕택이다. 대부분은 신약 개발에 매달리는데, 10년 안팎이 걸리고 천문학적 자금이 필요하다. 그는 생산 기반을 먼저 구축한 뒤 나중에 신약을 개발하기로 했다. 운도 따랐다. 2000년부터 2년간 바이오 선진국을 돌아다니며 조언을 구하던 중 세계적인 생명공학 기업인 제넨텍에서 동물세포 배양기술을 이전받기로 한 것이다. 어렵게 끌어 모은 3000억원의 자금으로 송도에 공장을 세우고 해외 제약사의 제품을 대신 생산하면서 기술을 축적시켜 나갔다.

 셀트리온이 글로벌 무대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특허가 끝난 항체치료제에 대해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제품 허가를 받아내면서다. 지난해 미국 존슨앤드존슨의 관절염 치료제 ‘레미케이드’를 복제한 약을 현재 ‘램시마’로 판매 중이다. 서 회장이 늦어도 6월까지 유럽연합(EU)에서 허가를 받을 수 있다고 공언한 제품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유방암 치료제 ‘허셉틴’, 림프종 치료제 ‘리툭산’ 등에 대한 바이오시밀러(특허기한이 끝난 바이오의약품의 복제약)가 임상 중이거나 곧 제품허가를 받을 전망이다. 이들 제품에 대한 임상시험용 제품을 수출하면서 2009년 1456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에는 3500억원으로 두 배 이상 뛰었다. 지난해 영업이익률도 상장사 최고 수준인 55.8%에 달했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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