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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5대|청와대의 역대주인공들을 본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이래 청와대는 여섯 번째의 주인공을 맞았다.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함으로써 출발한 제1공화국은 60년 4월 19일의 의거에 의해 붕괴되기까지 3대에 걸쳐 이승만 박사가 집권했으며 4·19의거로 세워진 제2공화국시대에는 내각책임제하에서 실권 없는 상징적 존재로서의 제4대 대통령직을 윤보선씨가 맡았다. 5·16혁명으로 세워진 제3공화국에서는 군사혁명을 지도한 박정희 장군이 제5대를 이었고 5·3선거에서 제6대 대통령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됐다.

<이 대통령>
「국부」의 이름으로 귀국환영을 받은 이승만 박사는 48년 5월 10일의 총선으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간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으로 뽑혀 7월 24일 정식으로 취임했다. 이 대통령은 취임 후 2년 후인 6·25동란으로 부산에 옮기기까지 경무대 안에서 주로 국무회의를 주재했으며 중앙청에서 열리는 국무회의에는 잘 참석하지 않았다.
임기 2년 동안 이 대통령은 우방제국과의 수교, 각종 법령과 제 제도의 마련 또는 개선 등 건국 첫 사업에 주력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질서를 유지했지만 48년 10월 남로당 지령에 의한 여수·순천 반란사건이나 남로당 국회 「푸락치」사건 등 공산당의 준동도 겪었다.
이 박사의 독선적인 집권 의지는 피난지 부산에서부터였다. 그는 52년 7월 4일의 대통령직선제, 국회양원을 골자로 하는 소위 발췌개헌을 거쳐 제2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그 뒤 그는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중임제한을 폐지시키기 위한 개헌에 착안, 54년 8월 6일 136명의 찬동을 얻어 소위 「사사오입」개헌을 감행, 3선의 길을 터놨다.
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이승만 박사는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와 싸웠으나 신 후보가 투표일 10일을 앞두고 급서하자 이 박사는 유효투표 70%를 얻어 3선되었다.
60년 3월 15일에 실시한 정·부통령선거에 또다시 출마한 이 박사는 우리 헌정사에 오명을 남긴 4할 사전투표, 3인조·9인조 투표, 선거 감찰반 동원 등 갖가지 수법이 동원된 이 부정선거의 결과 4·19의거를 초래, 드디어 12년간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고 이해 4월 29일 하야성명을 냈다.

<윤 대통령>
4·19의거로 세워진 제2공화국에서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윤보선씨는 비록 실권 없는 상징적 대통령이었지만 과정을 거쳐 구성된 양원합동회의에서 출석의원 263명중 208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 다음날인 13일에 4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윤 대통령은 경무대로 옮긴 후 이해 12월 30일 경무대란 명칭이 이승만 독재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못마땅하다하여 새로 청와대로 개명했다.
윤 대통령은 청와대 생활 10개월만에 5·16혁명을 겪었으며 계속 대통령으로 눌러있다 이듬해인 3월 정치활동정화법공포에 반대, 22일에는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박 대통령>
윤 대통령 사임후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은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은 청와대를 국가원수의 집무실로만 사용하면서 비서진(실장 이동원)에 맡겼었다.
민정이양 후 63년 10월 17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 장군은 이해 12월17일 제3공화국의 탄생과 더불어 제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 대통령은 3년반 동안의 임기 중 2백29회에 걸쳐 민정을 시찰, 평균 1주일에 한번이상씩 지방출장을 해 역대 대통령중 가장 부지런한 대통령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또 박 대통령은 64년 12월에 서독, 65년 5월 미국, 66년 2월 동남아 각 국을 순방했으며 66년 10월에는 「필리핀」수도 「마닐라」에서 열린 월남지원 7개국정상회담에 참석, 도합 네 차례에 걸쳐 외국을 여행했다. <오전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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