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나도 이런 집에서 살고 싶어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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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호 22면

1 런던을 위한 방(A Room For London) 내·외부 ⓒ Charles Hosea

알랭 드 보통. 이 영민한 스위스 출신 글쟁이는 타성적인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집과 말해보라”고 속삭인다. 게다가 ‘집이 말해주는’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밝히고 싶은, 알리고 싶은, 스스로를 일깨우고 싶은 갈망을 부추긴다. 그러고는 “잡지에 나온 집, 너무 비싸서 도저히 손에 넣을 수 없는 집에서 사는 상상을 하다가 이내 슬픔을 느끼곤 한다. 혼잡한 거리에서 매우 매혹적인 낯선 사람을 지나칠 때처럼 말이다”라고 자기 이야기처럼 딱 끊어서 맺는다. 한때 건축에 지독히 빠져서 글도 쓰고 책도 펴내고 강연도 하더니, 이젠 아예 집을 짓고 있다.

최명철의 집 이야기 <19> 알랭 드 보통과 ‘리빙아키텍처’

지난해 런던은 올림픽을 중심으로 한참 들썩였다. 여기엔 2012 런던페스티벌과 연계해 문화단체 아트앤젤(Artangel)이 후원한 이색적인 집짓기도 한몫했다. 템스 강변 워털루 브리지 옆 퀸엘리자베스 홀 건물 꼭대기에 이상한 배 한 척이 얹혔다. 조금 떨어진 런던아이와 함께 템스 강변의 명소가 된 이 집의 이름은 ‘A Room for London’. 국제 공모 500대1의 경쟁 속에서 뽑힌 이 집은 작가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The Heart of Darkness)』(1899)에 등장하는 템스 강변의 리버보트(riverboat)를 형상화한 것(데이비드 콘 건축사무소와 피오나 배너의 작품)이다. 대항해 시대의 맹주가 되었던 ‘지지 않는 해’ 대영제국의 영광과 그 시대 식민지 경영에 대한 뼈저린 반성이 교차하는 원작의 무게 덕분에 올림픽 개최지로서의 문화적 면모에 큰 의미를 더하고 있다.

2 균형 잡은 헛간(The Balancing Barn) 내·외부 ⓒ Living Architecture
3 널빤지 지붕 집(The Shingle House) ⓒ Charles Hosea 4 모래 언덕 집(The Dune House) ⓒ Living Architecture 5 기다란 집(The Long House) ⓒ Living Architecture

더구나 템스 강변의 ‘지는 해’를 마주하기에 적합한 이곳에서 그날의 항해일지(숙박일기를 쓰도록 하고 있음)를 기록하면서 보내는 하룻밤은 영국인에게는 매우 환상적이다. 최근엔 다양한 프로그램을 더했다. 음악인을 위한 ‘Sounds from a Room’, 작가들을 위한 ‘A London Address’, 미술인들을 위한 ‘Hearts of Darkness’, 시민들의 아이디어를 위한 ‘Ideas for London’ 등 네 가지 섹션으로 구분해 운영하고 있다. 이들이 펼치는 공연이나 퍼포먼스는 웹사이트를 통해 생중계되고 바깥의 템스 강변 대형 스크린에서 실시간 감상할 수도 있다.

덕분에 매 분기 추첨을 통해 주어지는 일일 숙박권(2인 300파운드)은 신혼부부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지금도 대기자가 수만 명이다. 2012년 한시적으로 운영하려던 계획도 바뀌어 이곳 주인인 사우스뱅크 센터와의 합의를 통해 당분간 연장했다.
이 집의 주인은 리빙아키텍처(www.living-architecture.co.uk)라는 비영리 사회적기업이다. 알랭 드 보통이 설립했는데 그는 현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근무한다. 이 단체가 하는 일은 말 그대로 ‘건축가가 지은 건축에서 살아보기’다. 서양에서는 건축(Architecture)과 건물(Building)의 개념이 달라 작가가 지은 집과 일반적인 집을 구분하고 있다. 홈페이지에는 “건축가가 지은 주택에서 직접 자고 식사하면서 어떤 곳에서 살아야 하는지 비전을 제시하겠다”고 한다.

'균형잡힌 헛간' 4박5일에 150만원
2010년 10월 완공된 제1호점 ‘균형 잡은 헛간(Balancing Barn)’은 정말 창조적이다. 영국 시골의 완만한 구릉 지형 위에 반은 땅에, 나머지 반은 경사지에 떠 있는, 마치 드가의 그림처럼 발레리나가 한쪽 다리를 들어 균형 잡고 있는 모습이다. 지형을 따라 가로로 앉혀야 할 긴 직사각형의 집을 역으로 세로로 설치해 놓은 꼴이다. 유럽 마을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헛간을 네덜란드의 친구(건축그룹 MVRDV)가 ‘선물(Gift)’한다는 설계 의도는 알랭 드 보통의 설립 취지와 교묘하게 맞아떨어진다. 현실과 꿈을 교차시키면서 휴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건축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이 집이 위치한 서포크(Suffolk) 지역은 런던 동북부에서 가장 아름다운 휴양지다. 북해에 면한 바닷가 근처에 있는 이 집은 거실과 식당 주방, 욕실이 갖춰진 방 4개의 8인실 주택이다. 통째로 4박5일 사용하는 데 810파운드(약 150만원), 1인 1박당 약 4만5000원 정도이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 부부들의 휴가 장소로 인기가 높다.
최고급 휴양지에 높은 수준의 건축가 작품인 전용 별장에서 저렴하게 휴가를 즐길 수 있다면, 덤으로 얻어지는 주최 측의 의도된 공부(?)쯤이야 상관 있겠는가. 이와 같은 프로그램으로 지어진 리빙아키텍처 시리즈는 총 5채이고 2014년에는 2채가 만들어질 예정이다. <표 참조>

생각할수록 아름다운 남의 나라 이야기이다. 매혹적인 글쓰기로 한국에서만 100만 부 이상 판매한 스테디셀러 작가이자 철학자가 그 이상 매혹적일 수 없는 집짓기를, 그것도 비영리로 사회적 기여를 목적으로 발 벗고 나섰다는 데 경의를 표하고 싶다. 찰스 왕세자의 건축에 대한 사랑과 국민주택을 위한 실천적인 노력에 더하여, 40대 초반의 알랭 드 보통을 갖고 있는 남의 나라에 대하여 부러움과 동시에 부끄러움을 가지게 되는 건 내가 나이 들어서일까?



최명철씨는 집과 도시를 연구하는 ‘단우 어반랩(Urban Lab)’을 운영 중이며,‘주거환경특론’을 가르치고 있다. 발산지구 MP, 은평 뉴타운 등 도시설계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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