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그딴 생각들 이젠 버리시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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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호 26면

저자: 김남희·쓰지 신이치 출판사: 문학동네 가격: 1만5000원

또야?’ 하는 가벼운 한숨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슬로 라이프(slow life), ‘느리게 살기’에 관한 책은 이미 적지 않게 나와 있는 참이니 기시감이 들 만도 하다. 제목에서부터 결론을 눈치채기도 어렵지 않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전혀 다른 방향의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일 터다. 이런 종류의 책이 갖는 한계가 그래서 지레 걱정되기도 한다. 읽을 때는 은단을 씹는 듯한 상쾌함이 들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겐 결국 일회성 소비로 그치는 아쉬움 말이다.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

그런데 이 책, 그렇게 오해받고 한쪽으로 치워진다면 좀 억울하겠다. 느리게 살지만 삶의 내공이 단단한 사람들이 그리는 삶의 풍경을 엿보는 일만으로도 독서의 의의를 충분히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산티아고 여행가’로 잘 알려진 김남희씨다. 30대 초반에 집 보증금과 적금 깬 돈으로 무작정 방랑의 길을 택했던 그가 일본의 문화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 쓰지 신이치를 만나 함께 썼다. 두 사람은 환경재단과 일본 NGO 피스 보트가 공동으로 연 민간 교류 프로그램 ‘피스 앤드 그린 보트’에서 인연을 맺었다. 1년간 부탄과 홋카이도, 안동과 오사카, 나라와 지리산, 강원도와 제주도를 다녔다. 두 나라를 오가며 길 위에서 숱한 사람들을 만났고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삶의 방식을 관찰했고 인생의 지향점을 재설정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얘기한 “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城)을 벗어나는 것”이라는 명제를 실천하는 과정이었다.

저자들이 만난 사람들은 평범하되 평범치 않은 이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택의 자유’란 ‘소비의 자유’에 지나지 않음을 일찌감치 자각하고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나선 용기 있는 이들이기도 하다. 생명평화 운동을 실천하는 도법 스님, 자연농법의 대가 가와구치옹, 30년 전부터 공정무역을 실천해온 나카무라, 20년 넘게 정신장애를 앓았으면서도 여유와 미소를 잃지 않는 시모노군, 신문사 사진기자를 하다 강원도 양양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진동2반 반장님 등이다. 21세기 속도전 대신 자신만의 스피드를 택한 사람들의 육성이 책의 무게감을 성큼 높인다.

김씨는 그들을 “부와 명예, 권력과는 거리가 먼 남자들”이라 부른다. 세속이 좇는 가치와 정반대 지점에 선 사람들. 그들을 만나면서 저자들은 우리 시대 유행어인 ‘위시 리스트’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란 말 대신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는 물건 목록’은 없을까를 고민한다.

지나친 긍정과 노력의 폐해도 지적한다. 한 뇌성마비 시인이자 팬터마임 배우의 말을 빌려 “분발하지 않는다는 건 행복하고 몸에 좋고 마음에도 좋다”고 말하는 게 대표적이다. 일본의 ‘틈새증후군’을 빗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증후군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을 위해 “한눈팔기, 어슬렁거리기, 빈둥거리기, 느긋하게 쉬기 같은 것의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는 제안은 사실 반갑다.

책을 읽고 나면 이런 ‘느리게 살기’류의 책이 더 많아져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의 삶을 바꾸는 데는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고, 그런 용기가 마련되려면 우선 수십 년간 ‘입력’된 ‘공식’이 바뀌어야 할 테니 말이다. 어쨌든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니 약간 고무되기도 한다.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을 허무는 것.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강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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