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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풍수의 역사] 신라 때 중국식 풍수 유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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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풍수를 논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중국에서 풍수사상이 흘러 들어온 신라 후기 무렵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전 문헌에서는 풍수라는 단어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훨씬 전부터 우리나라 고유의 풍수사상이 존재했다는 견해도 있다. 학자에 따라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최창조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는 “우리 고유의 자생풍수가 이미 기반을 다져놓은 상태에서 중국 풍수지리가 유입된 것”이라 주장했다.

신라 선덕여왕 일화는 자생풍수 근거 

자생풍수에 대한 근거는 『삼국유사』 선덕여왕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한겨울 옥문지라는 연못에서 며칠 동안 개구리가 울어대자 선덕여왕은 “여근곡이라는 계곡에 가보라” 했다. 살펴보니 백제군 500여 명이 숨어 있었다. 선덕여왕은 “성난 개구리는 군사 형상이고 옥문은 여성 생식기”라며 “남성이 여기 들어가면 곧 죽는 것이니 적병을 물리칠 것을 알았다”고 후에 설명했다 한다. 신라 4대 임금 석탈해가 초승달 닮은 땅을 얻어 왕이 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최 교수는 “중국 풍수가 들어오기 전 이미 풍수를 이용한 전형적 사례”라고 말했다.

중국에서 풍수를 들여온 인물은 도선국사로 알려져 있다. 당시 승려 사이에서는 당나라 유학이 유행이었다. 요즘 미국 유학을 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도선은 도당 유학을 하지 않았다. 도선이 중국 풍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기보다 기존의 자생풍수를 종합해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려, 화장=재력 의미해 

고려 공민왕릉.

고려에서는 왕이 죽으면 화장했다. 지금과 달리 화장이 재력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공민왕에 이르러 매장을 한다. 공민왕은 사실상 인질로 어린 시절 중국에 10여 년 머물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국 풍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뼈가 땅의 좋은 기운을 받아 후손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흔히 쓰는 ‘뼈대 있는 가문’이란 말도 여기서 유래했다. 자생풍수 대신 본격적으로 중국 풍수가 활약하게 된 단면이다.

조선시대 전체 송사의 80%가 산소 자리 싸움 

조선시대는 건국 때부터 풍수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풍수 논리에 근거해 치열한 토론 끝에 한성(서울)으로 수도를 옮겼다. 풍수 의존이 심해지면서 이름난 가문은 풍수 전담사를 육성하기도 했다. 풍수에 집착한 나머지 명당을 찾기 위해 가산을 탕진하거나 남의 묘를 파내 자기 조상 유해를 옮기는 폐해까지 이어졌다. 최교수에 따르면 중기 이후 산소를 두고 벌이는 싸움인 ‘산송’이 당시 지배계층이 벌인 전체 송사의 80%가 넘었다. 조선 후기엔 이런 집착이 일반인에게까지 퍼져나갔다. 정약용과 박제가 같은 실학자가 풍수를 비판한 것은 그만큼 풍수로 인한 폐해가 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일제, 민족정신 억압 수단으로 악용 

광화문에 지어졌던 조선총독부 건물.

일제강점기는 풍수가 역이용된 시기다. 당시 일본은 영국이 중국을 억압한 방식을 응용했다. 영국인이 중국 남부지방에 도로를 놔주겠다고 선산을 건드렸더니 사람들이 목숨을 내놓을 듯 반대했다는 것 말이다. 일제는 풍수가 민족정신을 옥죌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 생각해 명당을 훼손하는 방식을 택했다. 백두산 정기를 서울에 불어넣은, 이른바 용의 목에 해당하는 경복궁 북쪽에 총독 관저를 짓는가 하면 그 아래 입에 해당하는 광화문에 중앙청을 만들었다. 한민족의 목과 입을 조이고 막은 셈이다. 풍수를 왜곡되게 이용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풍수 관념을 미개한 미신으로 치부하면서 풍수는 암흑기를 맞았다.

묫자리 풍수에만 관심

해방 후 ‘풍수=미신’이라는 생각은 더 굳어져 갔다. 다만 좋은 묫자리에 대한 관심은 끊이지 않았다.

 풍수의 기본 사고는 자연과의 조화다. 건축·조경 등 생활 환경에서 풍수의 원리를 적용하기도 한다. 다만 서양식 건축에 치우쳐 있다 보니 의뢰인이 풍수 관련 요구를 하면 그에 맞게 반영하는 정도다. 한종구 청운대 건축공학과 교수는 “홍콩은 풍수를 건축의 중요한 요소로 보고 적극적으로 내세우는 데 비해 우리는 건축에 적극적으로 응용하지는 못한다”며 “좀 더 활발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홍콩이나 싱가포르에선 풍수 컨설턴트가 집 안 곳곳의 가구 배치 등 인테리어를 담당하기도 한다. 한 교수는 “화장문화가 발달해 묫자리보다 사는 집에 대한 관심이 많다”고 설명했다.

강나현 기자

참고문헌= 김종섭·신명신 공저 『풍수지리와 과학』, 이공원 『주역원리로 풀이한 풍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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