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엔 정치적 카드지만 … 개성공단, 기업엔 생명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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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권 개성공단입주기업협회 회장(앞줄 왼쪽 셋째)이 9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개성공단 정상화 촉구 대책회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개성공단이 북한의 잠정 중단조치에 따라 우리 기업이 입주를 시작한 2004년 이후 9년 만에 처음으로 ‘올스톱’됐다. 하지만 123개 입주기업은 북한과 우리 정부를 상대로 조속한 사태 해결을 촉구할 뿐 마땅한 대응책이 없어 발만 구르고 있다.

 개성공단입주기업협회 한재권 회장 등 대표단은 9일 오후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를 찾아갔다.

 기업인들은 황 대표와의 면담 자리에서 “개성공단은 우리의 피와 땀이 섞인 곳으로 절대 포기할 수 없다”며 “공단이 정상적으로 가동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이들은 또 정치권이 중소기업계와 협상단을 구성한 뒤 북한에 파견해 재가동 방안을 협의해 줄 것도 요청했다. 앞서 입주기업인 100여 명은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관에 모여 대책회의를 연 뒤 공단 정상화를 촉구하는 호소문을 내놨다. 이들은 성명서에 “개성공단은 남북 기본합의서에 따라 50년간 임차조건으로 우리 중소기업의 자본과 기술이 투입됐다”며 “공단의 운명과 존폐 여부 결정도 우리의 의견이 가장 우선 고려돼야 한다”는 입장을 담았다.

 입주기업협회 옥상석 부회장은 그러나 “입주기업 모두 ‘개성공단 포기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호소문 발표 이외에 마땅한 대응책이 없어 참담하다”고 말했다. 몇몇 기업인은 북한 당국이 조업 중단과 납품계약 불이행이 얼마나 치명적인 후폭풍을 몰고 올지 고려하지 않는 것에 대한 원망도 쏟아냈다.

 한 업체 대표는 “북한은 개성공단을 정치적 카드로 쓰고 있지만 우리 입장에선 생명선이 끊기는 것과 같다”며 “북측이 계약과 신뢰를 헌신짝처럼 버려서야 어떻게 추가 거래처 확보나 새로운 투자가 있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개성공단 가동이 완전 중단되면서 피해도 현실화되고 있다. 한 섬유업체 관계자는 “원청업체에서 하청물량을 일단 다른 업체로 돌리겠다고 통보해 왔다”며 “다시 공단이 가동된들 하청물량이 되돌아온다는 법이 없지 않으냐”고 답답해했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는 “김정일 사망 때도 문제가 없었는데 이번엔 바이어들의 주문 취소물량이 계속 들어온다”며 “거래처 역시 손실을 피하려는 조치인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전했다.

 이처럼 공단 가동 중단에 따른 피해가 본격화하자 정부와 금융권은 이날 지원책을 속속 내놓았다.

 한정화 중소기업청장은 “남북 경협기금 일부를 활용해 입주기업들의 피해를 최소화할 것”이라며 “피해 정도에 따라 채무상환을 유예하고 긴급 경영안정화 자금을 투입하겠다”고 말했다. 기업은행과 우리은행은 각각 입주기업에 1000억원을 지원한다. 이날부터 신청을 받아 업체당 5억원 한도 내에서 신용등급에 관계없이 대출해 주기로 했다. 또 기존 대출금 역시 최장 1년간 상환을 유예해 줄 계획이다.

 이와 별개로 입주기업 중 96개사가 공단 가동이 중단될 경우 최대 70억원까지 보상받을 수 있는 경협보험에 가입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보험은 공단이 한 달 이상 가동이 정지됐을 때만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 또 공장 가동이 일시 중단됐다 재개되거나, 다시 가동돼도 사업 재개가 어려운 경우는 혜택을 받을 수 없도록 보험상품이 설계돼 있다.

  개성공단 입주업체들은 “우리가 원하는 건 경협기금 지원보다 공단의 재가동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한 입주업체 관계자는 “20~30년 앞을 내다보고 개성에 공장을 세웠다”며 “협력기금을 받아 일시적으로 연명할 수는 있겠지만 직원들 일자리나 회사 앞날을 기약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는 “50억원을 투자해 공장을 짓고 북측 인력에게 미싱과 다림질을 가르쳤다”며 “시간과 금전적 비용이 보상금 몇 푼 받는다고 해결될 수 없다”고 말했다.

글=장정훈·김영민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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