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41) 새마을운동 점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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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주민들이 다리를 만들고 있는 모습. 왼쪽에 새마을운동 로고가 새겨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중앙포토]

난 관운(官運)이 좋은 사람이다. 관운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거다. 나에게 관운은 시대적으로 중요한 국가적 과제를 맡는 자리에 있었다는 뜻이다. 내무부 지역개발담당관으로 일하며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직접 수립하는 기회를 얻었고 새마을운동을 담당하게 됐다.

 1971년 8월 나는 내무부 지역개발담당관으로 임명됐다. 새마을운동이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란 이름으로 막 싹트기 시작할 때였다. 초기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여론을 돌리는 일이 급선무였다.

 나는 사업 전과 후 달라진 마을의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를 만들어 짊어지고 곳곳에 설명을 하러 다녔다. 가장 먼저 언론사 사회부장들을 오찬 간담회에 초청해 설명했다. 그 다음 한국 YWCA 연합회에서 요청이 왔다. 그때 YWCA 모임을 주재한 사람이 박영숙 전 안철수재단(현 동그라미재단) 이사장이었다.

 모교인 서울대에 가서도 설명회를 열었다. 권위주의 통치체제하에 관료가 대학에 가서 강연을 한다는 것은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총학생회장 출신 선배가 설명회를 한다고 그랬는지 다행히 학생회에서 도움을 줬다. 지금 마로니에 공원 자리에 서울대 대강당이 있었다. 후배 학생 500명 정도가 강당에 모였고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슬라이드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때 한 여학생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농촌의 초가집이 소박한 정취가 있는데 왜 지붕 개량을 해야 합니까.”

 답을 했다. “보기엔 좋을지 몰라도 해마다 초가집 지붕을 갈려면 짚이 많이 필요하고 힘도 듭니다. 그 짚을 소의 사료나 가마니, 새끼 등 고공품(짚을 엮어 만든 생활용품)으로 쓰면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요.”

 시간이 갈수록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하는 단체가 늘어났다. 농촌 현장에서도 변화가 일었다. 70년엔 전국 3만3000여 개 마을에 똑같이 시멘트와 철근을 지급했지만 다음 해에는 절반인 1만6600여 개 마을만 지원했다. 공동사업에 쓰지 않고 집마다 시멘트, 철근을 나눠 가진 마을은 제외했다. 우수한 마을에 우선 지원한다는 새마을운동의 원칙은 이때 윤곽이 잡혔다. 그랬더니 시멘트와 철근을 지원받지 못한 마을 중 6000여 곳에서 스스로 새마을 가꾸기 운동에 참여하겠다고 나섰다.

 이를 계기로 새마을 가꾸기 운동은 ‘새마을운동’으로 진화하게 됐고 72년 3월 새마을운동 중앙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새마을운동의 공식 출범이었다. 새마을운동은 빈곤 탈출에 대한 열망에 불을 붙이는 점화제 역할을 했다. 그때 같이 유행한 말이 ‘신바람’이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농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마을운동의 성과가 나타나면서 주무 담당관인 나의 업무도 늘어났다. 지역개발담당관이란 내 직명도 새마을담당관으로 바뀌었다. 정부 수립 이후 처음 등장한 한글 관직명이기도 했다.

 새마을운동 로고에 관한 일화도 하나 소개할까 한다. 72년 새마을담당관으로 한창 일할 때다. 새마을 배지와 기를 만들어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현상 공모를 했다. 예비심사를 했는데 응모작이 하나같이 빈약해서 재공모를 해야겠다는 결과가 나왔다. 외부 공모만 하다가 새마을담당관실 직원도 공모에 응할 수 있도록 했다. 새마을담당관실의 이봉섭(1934~2009·전 전라북도 부지사) 사무관이 2~3명 계원과 함께 팀으로 응모를 했다.

 이 사무관팀은 배지 문양으로 세 개의 싹이 돋은 초록색 잎을 노란색 원이 감싸고 있는 모습을 그려 제출했다. 노란색(황금색) 원은 소득(돈)을, 초록 잎 세 개는 근면·자조·협동을 뜻한다는 설명도 따라붙었다. 깃발은 배지와 같은 문양을 가운데 넣고 바탕은 초록색으로 만들었다. 깃발의 네모난 초록색은 넓고 기름진 평야를 상징한다고 했다. 보기에도 좋고 의미도 좋았다.

이 사무관팀의 응모작은 예비심사와 본 심사를 거쳐 최종작으로 선정됐다. 새마을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로고는 그렇게 탄생했다. 상금은 10만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돈으로 100만원 정도 되려나. 고맙게도 이봉섭 사무관팀은 상금 전액을 새마을 성금으로 냈다. 대신 내가 수고한 이들에게 저녁을 샀다.

정리=조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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