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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관이 택한 인생 2막 … 로펌 아닌 ‘이순신 인성’ 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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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4일 오후 부산 당리중에서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이 ‘이순신을 통해 배우는 인성교육’ 특강을 하고 있다. 그는 강연 도중 학생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대화하듯 강의를 진행했다. [부산=송봉근 기자]

“원균은 200척의 함선을 갖고도 왜군에 참패했지만 이순신은 단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무찔렀어요. 그 비결이 뭘까요?”

 “이순신이 원균보다 힘도 세고 싸움을 잘했기 때문이에요.” 한 남학생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답했다. 그러자 강단에 서 있던 60대 노신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순신은 원균보다 덩치도 작았어요. 하지만 훌륭한 인품(人品)으로 이끄는 그의 병사들은 누구보다 용감했습니다. 불리한 싸움에서도 이순신이 수많은 적군들을 물리칠 수 있던 것은 그 때문이에요.”

 지난 4일 오후 부산시 사하구 당리중 무용실에서 3학년 학생 1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특별한 수업이 열렸다. 이순신을 주제로 한 ‘인성교육’ 강의였다. 강연자는 다름 아닌 김종대(65) 전 헌법재판관. 지난해 9월 퇴임한 그는 지난 반년 동안 학교와 기업을 찾아다니며 40여 차례 이순신 강의를 해왔다. “이순신을 전쟁 영웅으로만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그에게 배워야 할 것은 전략과 지략이 아닌 훌륭한 인품, 즉 인성입니다.” 김 전 재판관의 설명이 이어지자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순신의 군사들은 ‘날 헛되이 죽게 하지 않겠구나’ 하는 믿음이 있었어요. 수많은 전투에서 그의 인품은 병사들에게 수백 척의 전함(戰艦)보다 더 큰 힘이 됐습니다.”

 한 편의 영화를 보듯 학생들을 빠져들게 하는 그의 강의는 학생들 생활 얘기로 이어졌다. “공부를 잘하고 실력을 기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른 인성을 갖추는 일이에요. 자기 욕심만 차리지 않고 남을 배려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 실력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된답니다.” 꼬박 60분간 학생들은 자세 한 번 흐트러뜨리지 않고 김 전 재판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강의를 들은 손장현(15)군은 “내 생각만 하고 지냈던 게 부끄럽다, 친구들을 더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박필경(15)양도 “공부만 잘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른 인성을 갖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40년 가까이 법조인으로 살아온 김 전 재판관이 인성교육 강사로 나선 이유는 뭘까. 은퇴 후 전관예우로 로펌에서 많은 돈을 벌며 편한 길을 갈 수도 있었지만 그의 선택은 남달랐다. “사회가 많이 병들어 있어요. 이를 치유할 훌륭한 약재가 이순신 정신입니다.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의 인성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 이순신을 더욱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이순신을 처음 만난 건 1975년 군 법무장교로 복무할 때다. 사병들의 정신교육 소재로 이순신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매력에 빠져들었다.

38년 동안 이순신을 연구하면서 관련 책만 네 권을 냈다. 그러는 동안 자신 또한 이순신을 닮아갔다. 공직생활의 대부분을 고향인 영남 지역에서 ‘향판(鄕判)’으로 근무한 그는 법원 내에서 가장 성실한 판사로 꼽혔다. 지난해 퇴임 때는 30여 명의 후배 판사들이 직접 글을 써 그를 위한 책을 엮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8년 전엔 퇴임 후 농사부지로 쓸 예정이었던 고향 근처 땅을 복지재단에 기증했고, 현재는 부인과 함께 80대 노모를 모시고 사는 부산의 아파트 한 채만 남았다.

 이순신을 닮기 위해 노력했던 그는 자식교육에도 남달랐다. 일주일의 절반은 꼭 자녀들과 저녁을 먹었고, 그때마다 이순신 정신을 얘기하며 밥상머리교육을 했다. 덕분에 사법연수원 연수생인 아들 윤기(32)씨와 미국 MIT에서 박사 과정을 밟는 딸 혜전(29)씨 모두 바르게 자랐다는 주변의 평을 듣는다. 그의 최종 꿈은 ‘이순신학교’를 만드는 일이다. “이순신 유적지를 아이들과 함께 둘러보며 그의 정신을 가르치는 학교를 꼭 만들 겁니다.”

부산=윤석만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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