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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화평론가의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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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만약 고다르 신작과 존 웨인 신작을 똑같은 잣대로 들여다본다면 그것은 두 영화 모두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좋은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도전받게 하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좋은 평론가는 답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4일(현지시간) 세상을 뜬 세계적인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남긴 말이다. 오랜 암 투병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블로그 등을 통해 왕성한 활동을 했다. 1967년 시카고 선타임스의 평론가가 된 후 1년에 평균 200편의 리뷰를 썼다. 사망 직전인 2일에는 “지난해에는 306편의 리뷰 등 내 경력상 가장 많은 글을 썼다. 앞으로는 선별적인 리뷰를 싣겠다. 내가 꿈꾸던 일을 하게 됐다. 쓰고 싶은 영화에 대해서만 쓴다는 것이다”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다. 영화관에서 뵙겠다”는 것이 생애 마지막 글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현학적이지 않은 쉽고 진솔한 그의 글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영화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뉴욕타임스가 “보통 사람을 위한 평론가” “영화 평론을 미국의 주류 문화로 만들었다”고 평한 이유다.

 국내에도 추모 열기가 뜨거웠다. 2002년 선댄스영화제에서의 영상이 SNS에 속속 올라왔다. 아시아계 미국인 감독의 ‘관객과의 대화’ 도중 극중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부정적 묘사를 문제 삼은 한 관객의 질문에 대해 객석의 에버트가 벌떡 일어났다. “당신의 질문은 오만하고 무례하다. 아무도 백인 감독에게 왜 백인을 저렇게 묘사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아시아계 미국인도 다양한 캐릭터를 묘사할 권리가 있다.” 영화적 자율성과 다양성을 일갈한 그의 분노 섞인 목소리에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영화평론가 최강희씨는 우리 현실을 개탄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에버트는 잘 알려진 대로 동료 평론가 진 시스켈과 함께 TV프로그램 ‘앳 더 무비스(at the movies)’에서 매해 최악의 영화를 선정했다. 좋은 영화가 나오면 둘 다 손가락을 번쩍 쳐들었다. ‘투 섬스 업(two thumbs up)’의 기원이다. 최씨는 “이제 한국 방송에서 최악의 영화는 말할 수 없다. 평론가는 쇼핑 호스트를 자처해야 생존할 수 있다. 영화비평은 TV에서 사라졌고, 개그맨들의 통통 튀는 영화 소개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썼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백악관의 추모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수십 년 동안 미국인들에게는 그가 곧 영화였다. 에버트는 영화의 매력을 잡아내 우리를 마술의 세계로 데려다 줬다”고 애도했다.

 과연 우리 대통령은 어떤 평론가, 혹은 문화예술인의 죽음 앞에 이런 논평을 낼 수 있을까?

 정치가 문화를 존중하는 것, 역으로 그만큼 존중받는 평론가가 살아남는 것. 둘 다 참으로 부러운 ‘문화풍경’이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