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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 사령관과 촬영장 감독의 권위를 떠받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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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호 14면

1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바로셀로나 의자. ⓒ Vitra Museum

서양에서는 중세 때까지만 해도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는 왕과 귀족, 집안의 가장 정도만 앉을 수 있었다. 나머지는 대개 등받이가 없는 스툴(stool), 즉 걸상에 앉았다. 의자는 처음 태어날 때부터 앉아서 쉰다는 기능보다 ‘누가 그곳에 앉느냐’라는 상징성이 더 중요했다. 다시 말해 의자는 권위를 상징하기 위해 태어난 물건이다.

김신의 맥락으로 읽는 디자인 <15> X자 프레임 접이식 의자

최초의 의자에 앉은 사람은 모계사회로 추정되는 시대의 여성이었다. 약 1만 년 전 토우가 발견되었는데, 의자에 앉은 여성이 묘사되어 있었다. 의자를 오직 기능적인 관점에서 디자인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이니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권위의 상징으로서 기능했던 의자들은 어떻게 디자인되었을까? 가장 오래된 의자 중 하나인 고대 이집트 왕의 의자를 보면 온통 화려한 금장식이 되어 있다. 특히 등받이는 섬세하게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그런 등받이는 왕의 후광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장식성은 왕의 의자로서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아주 평범해 보이는 의자도 있었다. 등받이가 없는 접이식 의자다. 낚시꾼들이 휴대용으로 사용하는 미니 의자와 똑같은 구조다. 다리가 X자로 생겨서 접히는 의자. 평범해 보이는 이 의자는 이집트 귀족 집안에서 그것도 남자들만 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에 등장한 이 X자 구조의 접이식 의자는 귀족 남자들이 사용했다는 역사적 배경 덕분에 서양에서 오래도록 권위를 의미했다.

2 접이식 감독 의자에 앉아 사자에게 연기 지도를 하는 앨프리드 히치콕. 3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X자 모양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새겨진 로마의 동전. 4 이집트의 전형적인 접이식 스툴을 덴마크 디자이너 올레 밴셔가 현대적으로 다듬었다. 5 고대 로마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최고 권위의 의자로 사용되었던 쿠룰레(Curule) 또는 셀라 쿠룰리스(Sella Curulis).

이집트 귀족 남자만 앉던 의자
로마시대의 한 동전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X자 프레임 스툴에 앉아있는 모습이 묘사된 것이 있다. 기원전 약 100년 전 로마 공화정 시대에 등장한 쿠룰레(Culure) 의자는 왕의 의자를 제외하면 고위 행정관들만이 앉을 수 있는 최고로 권위적인 의자였다. 이 의자는 앞에서 보았을 때 X자가 곡선으로 부드럽게 가로지르는 구조를 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히 고대 이집트의 접이식 의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쿠룰레는 고대 로마로부터 고딕을 거쳐 르네상스까지 이어졌다. 르네상스 이후의 서양 회화를 보면 이 쿠룰레 의자가 등장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 의자가 르네상스 이후에는 귀족과 부자들에게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려준다.

X자 구조의 접이식 의자가 가장 큰 활약을 보인 곳은 전쟁터다. 등받이가 없는 접이식 의자는 주로 사령관을 위한 것이었다. 군인들은 이 전쟁터에서 저 전쟁터로 옮겨다니기 때문에 가볍고 간편하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접이식 의자가 안성맞춤이다. 사령관은 전투가 벌어지면 언덕이나 산 중턱과 같은 지형이 높은 곳에 올라가 전투를 분석하고 전술을 짜야 하는 만큼 이런 간편한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게다가 산, 들, 강가, 바닷가 어떤 환경에서도 접이식 의자는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다. 이는 전국시대 일본으로도 전해져 접이식 의자에 앉아있는 사무라이 대장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을 쉽게 볼 수 있다.

1900년 골드 메달 캠프 컴퍼니는 다리가 X자로 접히고 앉은 사람의 무게를 견디도록 강철 경첩을 다리 프레임에 연결한 야외용 피크닉 의자를 발표했다. 천으로 좌석과 등받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무게도 가볍고 공간도 절약할 수 있어서 휴대용 의자로 그만이었다.

할리우드에서 이것을 감독 전용 의자로 만든 것은 적절해 보인다. 감독도 사령관처럼 현장을 빈번하게 이동한다. 사령관이 수많은 장병들로 하여금 일사불란하게 전투에 임하도록 명령을 내리듯 감독도 촬영현장에서 혼자 의자에 앉아 배우의 연기와 세트, 조명을 면밀히 관찰하고 수많은 스태프들을 통제해 최고의 장면을 연출하고자 한다. 감독은 촬영장의 사령관인 것이다.

이 접이식 감독의자는 등받이 천 뒷부분에 감독의 이름을 새겨 누구도 감히 그 자리를 넘볼 수 없도록 권위를 부여받는다. 비록 비싼 재료로 만들지 않았고 화려하게 장식하지도 않았지만, 뛰어난 휴대성과 선명한 서명으로 말미암아 접이식 의자는 영화감독의 아이콘이 됐다.

스타 감독들은 이 접이식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홍보하기도 한다.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한 사진에서 접이식 감독의자에 앉아 MGM사의 로고 영상으로 유명한 사자에게 연기지도를 하고 있다.

20세기 ‘바로셀로나’로 모던하게 재탄생
접이식 의자는 그 밖에도 모던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에게도 영감을 불어넣었다. 독일의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1929년 스페인 박람회의 독일관 설계를 맡게 된다. 모더니즘 건축사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한 이 건축 프로젝트에서 미스는 자신이 새롭게 표현한 건축언어에 맞는 의자가 없다고 판단하고 이 공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의자를 추가로 디자인한다. 그는 박람회 기간 중 스페인 국왕이 독일관에 방문한다는 정보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 형태는 모던하지만 권위적인 모티프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고대 로마로부터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최고 지위제의 하나로 쓰였던 쿠룰레 의자의 X자 프레임이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가 디자인한 의자는 새 시대의 새 재료인 크롬이 도금된 강철을 활용했다. 외관도 쿠룰레의 육중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날씬하고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절제된 모습이었다. 미스는 1950년대 이후 철 골조에 유리 커튼월로 마감된 현대식 고층 건물을 전 세계 도시에 퍼뜨리게 된다. ‘바로셀로나’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X 프레임 의자는 미스가 창조한 모던한 공간 속에서 가장 빛을 밝히는 의자로 명성을 얻게 된다. 동시에 커다란 로비의 차가운 공간 속에 놓인 바로셀로나 의자를 보면 왠지 함부로 앉지 말아야겠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의자의 구조와 형태 안에 권위의 상징이 들어있기 때문 아닐까.



김신씨는 홍익대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7년 동안 디자인 전문지 월간 ‘디자인’의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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