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시간탐험 (49) - 루브 포스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19년은 미국 역사상 백인과 흑인간에 가장 끔찍한 인종 갈등이 있었던 해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시카고에서 흑인 소년의 고무보트를 백인 전용 해안가에 가까이 띄웠다는 이유로 돌로 소년의 목숨을 잃게 했던 사건은 결국 38명이 사망하게 되는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졌다.

흑백간 인종 분규는 시카고를 비롯 26개 도시로 확산되었고 그동안 인종차별로 억압받았던 흑인들 사이에서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한 움직임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움직임은 산업과 문화, 경제 등 사회전반에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런 분위기는 프로야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미국 전역에는 1885년 쿠바출신 흑인들이 주축이 되었던 'the Cuban Giants'이후 흑인들만으로 구성된 많은 야구팀들이 지역리그 등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당시 흑인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각지의 흑인들만의 야구팀을 하나의 리그로 묶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승화되었다. 그리고 1920년 8개팀(the Kansas City Monarchs, the Indianapolis ABCs, the Dayton Marcos, the Chicago Giants, Chicago American Giants, the Detroit Stars, the St.Louis Giants, the Cuban Giants)으로 최초의 흑인들만의 리그인 '니그로 내셔널리그(the Negro Mational League)', 일명 니그로리그가 탄생하게 되었다.

니그로리그의 중심에는 루브 포스터(Andrew 'Rube' Foster)가 있었다. 젊은 시절 뛰어난 투수이기도 했던 포스터는 백인들의 지배로부터 흑인들만의 야구를 지키기 위해 전국의 흑인팀들을 모아 니그로리그를 결성하였다.

Chicago American Giants(이하 아메리칸 자이언츠)의 구단주이자 감독이기도 했던 포스터는 190cm가 넘는 큰 키에 100kg가 넘는 거구의 마음좋고 친절한 전형적인 텍사스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늘 권총을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뉴욕이나 시카고와 같은 대도시의 야구장을 사용하기 위해 백인 구장 소유주와 만날 때에는 그 누구보다도 거칠고 위협적인 인물로 돌변하였다.

그가 추구하는 야구의 스타일은 한마디로 '빠르고 공격적인 야구. 특히 그가 이끌었던 아메리칸 자이언츠는 그의 야구 스타일의 산물이었다. 주자들에게 늘 슬라이딩을 할 것을 주입시켰고 선채로 태그아웃을 당할 경우 그 주자는 가차없이 5달러씩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의 팀의 선수들은 예외없이 누구나 번트를 정확히 댈 수 있어야 했고, 도루를 할 줄 알아야 했다. 그의 야구스타일은 주위로부터 '야구인지 경마인지 모르겠다.'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지만 그런 야구스타일은 니그로리그 4년 연속 정상의 팀으로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1923년까지 포스터의 니그로 내셔널리그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매년 수십만명의 흑인들이 경기장을 찾았고 도시마다 흑인들로부터 엄청난 성원을 받았다.

그러나 포스터의 승승장구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니그로 내셔널리그의 성공을 지켜본 백인 사업가 에드 볼든은 1923년에 니그로 내셔널리그를 본뜬 'the Estern Colored League(이하 유색인종 리그)' 를 창설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리그가 잘 경쟁하면서 1924년에는 최초의 니그로 월드시리즈를 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포스터의 니그로 내셔널리그는 유색인종리그에 자금력에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선수들은 더 많은 수당으로 유혹하는 백인사업가가 이끄는 리그에 넘어가게 되었다.

흑인 야구팬들은 자신들의 스타들을 따라 유색인종리그로 옯겨갔고 포스터의 니그로 내셔널리그는 엄청난 재정적 압박에 시달리게됐다.

결국 포스터는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지 못했고, 그의 리그와 팀은 다른 백인 사업가에게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모든 것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늘 백인들의 월드시리즈에서 공을 던지고 있다는 망상으로 정신병원에 수용되기까지 하였다.

그런 고통속에서 그는 193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뒤 니그로리그는 1948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흑인만의 진정한 의미의 니그로리그는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죽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니그로리그의 아버지' 루브 포스터는 훗날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1981년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석무 명예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