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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 핵위기와 석유이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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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한 방울의 석유는 한 방울의 피만큼 값진 것이라고 말했다(1918).

독일 총리 헬무트 슈미트는 석유 이권을 둘러싼 경쟁은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1979).

아버지 조지 부시 대통령은 쿠웨이트 유전이 사담 후세인의 손에 들어가면 "우리의 경제와 생활방식과 자유가 피해를 본다"는 말로 91년 걸프전쟁을 정당화했다.

*** 화력발전 불쑥 꺼낸 美관리

걸프전쟁의 중요한 동기는 석유였다. 아들 조지 W 부시가 준비 중인 이라크공격의 배경 그림도 석유다. 그리고 우리는 북한 핵 문제 해결에도 스멀스멀 석유 이권이 끼어들고 있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서울을 조용히 방문해 노무현 당선자와 핵심 참모들을 만나고 돌아간 미국 정부의 한 고위관리는 북한에 건설 중인 경수로 발전소와는 별도로 북한에 화력발전소를 지어주는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경수로 발전소 계획을 화력발전소로 대체하자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제안에 대한 수정안인 셈이지만 화력발전소를 북한과의 흥정거리로 삼겠다는 공통점이 있다.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 셀릭 해리슨은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뤘다('창작과 비평' 지난해 겨울호). 해리슨은 사할린 가스 개발에 2백억달러를 투자할 계획을 갖고 있는 엑손 모빌이 미국 정부의 승인이 나면 사할린에서 북한의 동해안을 거쳐 서울 부근에 이르는 3천㎞의 파이프라인을 건설할 방대한 구상을 소개했다.

파이프라인 완공까지는 4년밖에 안걸리고 비용도 27억달러 정도로 추산된다. 파이프라인이 건설되면 북한은 적지 않은 통과 수수료를 받고, 미국은 북한에 2백50㎿짜리 가스발전소 8개 정도를 지어줄 수 있다는 구상이다.

북한에 사할린에서 끌어 온 가스를 연료로 하는 발전소를 짓는다는 것은 록펠러가(家)의 스탠더드 석유그룹의 엑손 모빌에는 '대박'을 의미한다.

미국 회사가 사할린에서 개발한 가스를 한국까지 끌어오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고, 그 가스를 가지고 북한을 위해 경수로 발전소보다 훨씬 싸고 빠르게 전기를 생산한다는 발상은 핵 위기 해결을 위한 협상에 전적으로 새로운 요소가 등장할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것이 현실성을 갖는 이유는 부시 대통령과 그의 안보팀이 석유이권에는 특히 민감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부시는 지난날 텍사스에서 직접 마르부스토 부시와 하켄이라는 석유개발회사를 운영했다. 딕 체니 부통령은 1995년에서 2000년까지 핼리버튼 에너지회사에 참여했고, 안보담당 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91년에서 2000년까지 스탠더드석유 계열인 셰브론의 고문을 지냈다. 셰브론은 유조선 하나를 아예 라이스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

이라크 전선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대한 지지의 조건으로 사담 후세인 이후의 이라크에서 석유이권 참여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최상위 석유기업들인 루코일.유코스.튜멘.시브네프티는 부시 정부와 선이 닿는 텍사스의 법률회사들을 끼고 활발한 막후 흥정을 벌이고 있다.

*** 北 가스발전소 변수 대비를

지금 건설 중인 BTC 라인은 대표적인 '정치적 송유관'이다. 아제르바이잔의 석유를 지중해로 나르는 BTC 라인은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 중간 경유지인 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 종착점인 터키의 지중해 연안도시 제이한(Ceyhan)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이다.

거기에는 부시가(家)의 친구인 전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가 대주주 BP의 법률담당으로 참여하고 있다.

요란한 특사 외교로 핵 위기가 막바지에 이른 지금 미국은 북한의 핵 무장을 저지한다는 고상한 명분 외에 경제적인 실리를 챙기는 데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가스발전소는 북한과 미국의 이해의 연결고리가 될 수도 있다. 석유와 가스라는 지극히 정치적인 물건이 북.미 관계 개선의 촉매제가 된다면 엑손 모빌의 '대박'이 배 아플 것도 없다.

가스가 핵 문제 해결에 끼어들 가능성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석유는 자주 인간의 욕망을 앞세워 역사를 만들었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